brunch

매거진 살다보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동훈 Sep 19. 2018

비싼 자유

Freedom is not free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는 내 자유를 버리는데서 시작한다.


미국 위싱턴 DC에 위치한 한국전쟁 참전기념 공원 비문에 새겨진 말이다. 자유는 결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 명단이 새겨진 돌판에는 1950~1953년 사이에 졸업생의 반이 전사한 것으로 나와있다. 한국전에서 사망한 것이다. 또 해당 연도에는 이렇게도 씌어있다.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조국의 부름을 받고 가서 죽다.' 표면적으로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순종한 것이지만 실은 대의명분이 무엇이고 전 인류적인 신념이 무엇인지 알기에 자기 목숨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막아선 이들이다.

위싱턴 DC에 위치한 한국전쟁 참전기념 공원 : 픽사 베이

1980년대 후반 나는 소위 말하는 민주화를 경험했다. 당시에 서울의 중심가에 살았고 고등학생이었다. 시위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시내에서 날아오는 최루가스를 집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 419 민주혁명 때 시내로 몰려나갔던 학생중 중고생은 물론 보통(초등) 학교 학생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하니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의 의식수준은 퇴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에서는 최루탄과 쇠 파이프 그리고 꽃불이라고도 불렸던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현장에 서 있었다. 내가 나섰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에 휘말렸다는 것이 옳다. 마치 1950년 세상이 누군가를 전쟁터로 끌고 갔듯...

내 젊은 시절, '지랄탄'이라 불렀던 Tear Gas Grenades, 최루가스 수류탄 : 위키디피아

우리가 20년 넘게 누렸던 자유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요즘 학생들은 학생식당 밥값의 책정기준이나 원재료의 품질 또 조리종사자의 처우에 관심조차 없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것에 학습됐다. 왜 공부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고등학교까지는 대학, 대학생 돼서는 취업만이 인생이 목적이어서 그럴까?


소위 정치적인 학생활동은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시들었다. 최근 PD네 NL이네 하는 소위 급진적 좌파 학생운동은 90년에 정점을 찍었다. 이어 한국이 경제적 풍요의 극치를 달리자 식당 밥값이나 기성회비 같은 복지 투쟁으로 바꿨다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도 없다. 최근 이화여대를 다르게 보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런 맹탕의 시대에 그들이 보여준 항거가 너무나 희귀해서다.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은 이젠 내 밥그릇 챙기기도 어렵고 부모가 밥그릇 챙겨줘도 여전히 밥벌이 걱정에 전전긍긍이니 국가와 민족은 고사하고 내 주변 사정도 관심 없다. 그저 내 생존에 도움이 되어야만 관심이 있다.


직장인들은? 80년대 말 민주화 운동, '서울의 봄'은 사실 직장인들의 참여로 결론이 앞당겼다. 점심시간 넥타이를 두른 직장인들이 대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거리로 나왔고 자신의 회사 창문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내렸다. 젊은시절 그것을 경험했던 지금의 장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소위 태극기 집회에 나온 장년들은 그 시절 어디에 있다가 이렇게 거리로 나왔던가? 또 나처럼 그 장관을 봤던 지금의 중년은 뭘 하고 있을까? 그런 간접경험도 없고 그 자유의 수혜만 받은 더 젊은 사회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는 모두들 내 밥그릇에 눈을 박고만 있는가?


지금은 몸으로 자유를 쟁취하던 시절과는 다르다. 좀 더 간접적으로 그것을 유지하고 쟁취할 방법도 있다. 온라인! 그것은 꽃불보다 강하고 심지어 총칼보다 세다. 하지만 SNS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함께 몸을 비비고 있다. 자유와 종속도 마찬가지다. 공존하기 어려운 두 부류가 기름과 물처럼 섞여있다. 페이스북 같은 SNS는 내 성향에 따라 철저하게 노출되는 정보를 통제하기에 개인의 성향은 극단의 한 방향을 끌려간다. 두 가지 다른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기는 어렵다. 돈이 관련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 개인의 이야기와 취향을 자랑하는 과정에서도 일부 현대인들은 통제받고 끌려다니는 꼴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공존한다. 두 다른 이야기를 중간에서 보고 있는 이도 있다. 그들의 통제 방법을 이해한다면 가능하다.


지금을 사는 많은 이들이 대의명분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지난 탄핵정국을 보며 분노하던 이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낸 세금이 엉뚱한 사람들에게 갔다" 당연히 화를 낼 이유지만 이 말을 곱씹어 보면 그가 화난 이유는 '내가 낸 세금이 나 아닌 다른 이에게 돌아간 것' 때문이다. 이 비슷한 이유로 미국 중산층이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 도입을 거부했다. 이 말을 조금 과장하면 이렇게 된다. "내가 낸 세금만큼 내게 돌아오면 난 만족하고 살게" 난 요즘 젊은이들의 문제를 걱정하면서 그 아이들을 저렴한 가격에 부리는 고용주를 봤고 전임 대통령을 욕하면서 내 주변에 최 모 씨 같은 키맨(Key-man) 없음을 한탄하는 사람도 봤다.  전임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을 비난하지만 정작 같은 맥락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것은 모른다.


도덕성은 어떤가? 전두환 정권은 성문화·스포츠 등의 3S로 국민 우민화를 시도했다. 지금 와서 보면 참으로 교활하지만 그 시도는 성공했다. 아이의 아빠요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사람이 반라의 여자 사진 버젓이 자신이 개인 미디어에 올리면서 다 같이 즐기자 한다. '남자라면 이런 사진 좋아한다'나? 말은 맞다. 수컷은 암컷의 성기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그걸 억제하고 개인의 것으로 숨길 줄도 알아야 하는데 다 같이 짐승 되자고 한다. 더 무서운 사실은 그 의도다. 인기를 얹기 위해서다. 전두환의 망령은 대한민국의 많은 남자들 사이에 일반화됐다. 인기=명예=돈=권력이 복잡하게 얽힌 현대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게다가 자기 자신도 이런 행동이 무엇인지 모른다는데는 더 큰 아픔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비싼 자유를 소비했고 이젠 스스로 돈과 권력이라는 속박에 메여가고 있다. 실제로 내 것도 아니고 영원히 내 손에 있을 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 또 그것을 미끼로 던지는 누군가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60여 년 전 미국의 젊은 엘리트들은 신념에 따라 조국의 부름에 따라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목숨을 바쳤다. 그래서 "미국은 우리의 은인이다" 이런 논리는 일면 옳다. 배울 점도 많다. 다만 이 논리를 펴는 이들이 어떤 목적으로 주장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나는 오늘 그들이 사지로 자신을 내던진 이유가 뭐냐에 집중한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그것을 통해 어떤 일들이 일어났지, 아니 그들이 이 땅에서 묻히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진주만 공습 : 위키디피아

한국전쟁은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5년 후에 일어났다. 공산세력의 확장에 대한 불안이 커지던 시기다. 앞선 세계대전에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공격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공포에 떨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그것이다. 한국의 적화통일은 악몽의 시작이고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국가가 위험하다는 의식이 있었다. 일면의 공명심도 있었을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이용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국가는 젊은이들을 지배하지 못했고 젊은이들은 나보다 가족이 가족보다는 국가 공동체가 중요했다. 이건 당시 미국 청년뿐 아니라 중국과 소련 땅 또 몽골과 저 멀리 파리에서 죽어간 우리 선배님들도 마찬가지다.


한편 세계 2차 대전 중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 졸업생 중 1/3이 전사한 이유와 영국 황태자가 해군 복무를 규정보다 더한 이유는 조만간 다루고 싶은 주제이다. 우리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입에서만 맴도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최저시급 인상, 자영업자 죽인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