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가족 여행이 즐거운 추억 대신 말다툼과 상처로 마무리된 경험이 있으신가요.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시간이 어째서인지 서로를 향한 날 선 말들로 채워지곤 합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시간, 우리는 ‘왜 항상 반복될까’라며 자신을 탓하곤 합니다. 혹시 당신도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놓아주지 못해 끙끙 앓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최근 제게 큰 울림을 준 책, 멜 로빈스의 <렛뎀 이론>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듭니다.
시간과 에너지만 기꺼이 투자한다면 당신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사소하고 얕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이들을 낭비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즉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멈춰야 한다. <렛뎀 이론>
이 문장은 두 가지 명확한 진실을 우리 앞에 세웁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라는 자원의 무한한 ‘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타인을 향한 통제 욕구를 ‘멈추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 소중한 자원을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 즉 타인의 마음에 쏟아붓는 순간 고갈되고 맙니다.
이제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시간이 아닐까요. 우리는 타인을 결코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수도, 나를 향한 미움을 거두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고유한 영역인 ‘자유의지’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장 가까운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사랑하기에 더 깊이 개입하고 통제하려는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부모는 ‘올바른 길’이라는 신념 아래 아이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통제는 아이가 성장했을 때도 지금의 사회적 기준이 유효할 것이라는 기대를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미래를 단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가 그때에도 변치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버려 두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타인을 바꾸려는 헛된 시도를 멈추고,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내가 먼저 실천하기’를 시작하면 됩니다. 아이가 스마트폰을 내려놓길 바란다면,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는 내 모습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아이가 책을 읽길 바란다면, 거실에서 함께 책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이는 부모의 말이 아닌 행동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단한 하루 끝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허용하며 나 역시 편안함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아이와 함께 다른 유익한 활동을 찾아 나서며 스스로 모범을 보일 것인지를 말입니다.
아이의 삶은 온전히 아이의 것입니다. 공부를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면, 그로 인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는 결과 역시 아이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그 선택과 결과를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강압과 권위로 아이를 이끌 수 있는 시기는 길지 않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부모의 마음에는 무거운 죄책감 대신 평온이 찾아옵니다.
최근 미술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궁체 쓰기를 지도한 적이 있습니다. 물로 쓰는 서예 도구라 옷이나 얼굴이 더러워질 염려는 없었지만, 교실은 순식간에 물장난으로 시끄러워졌습니다. 과거의 저였다면 분명 언성을 높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아이들을 그저 내버려 두었습니다. 다른 친구의 학습을 방해하는 아이에게만 조용히 다가가 상냥하게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에 모든 아이를 동시에 돌볼 수 없는 저의 물리적 한계였습니다. 통제하려 들지 않았을 때 역설적으로 상황은 더 쉽게 정리되었습니다. 강압적이지 않은 태도에서 진정한 권위가 생겨남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글은 저의 개인적인 사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생각할 작은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