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라도 빨리 오빠를 ‘들고 갈 수 있는’ 크기로 만들어버리자."
이 구절만 보면, 공포 영화 대본의 한 구절처럼 느껴진다.
무라이 리코의 <오빠가 죽었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180cm가 넘는 오빠를 장례를 치르고 유골함에 넣는다는 의미다.
오빠라는 표현과 '들고 갈 수 있는'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크기로 만든다는 표현도 잔혹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저 구절을 통해서 느껴지는 무심함.
남보다 못 한 가족이라도, 결국은 시신 인수는 가족만 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
아직 가족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은 내게는 충격적인 구절이다.
그리고 저 한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들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느끼는, 마치 주민 센터에서 등본이라도 떼는 것처럼.
평생 미워하던 가족이 끝까지 짐처럼 느껴지는 현실.
굉장히 사실적인 에세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너무나 솔직해서 충격적이다.
재밌는 건 저런 표현을 한 작가가 유골함을 집에 보관한다는 것이다.
남은 혈연관계가 본인뿐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들고 갈 수 있는' 크기로 만들어서 집으로 들고 갔다.
글을 읽는 내내, 죽은 오빠에 대한 불편함과 미움이 가득한데도 말이다.
나도 누나와 남동생이 있다.
가끔 카톡이나 주고받는, 데면데면한 사이다.
언젠가 내가 죽는다고 생각했다.
내겐 다행히 아내와 딸이 있다.
그리고 누나와 매형과 동생과 제수씨도 있다.
본인의 장례식을 걱정하는 고인도 없겠지만,
외롭진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글을 쓸 시간에, 잠깐이라도 가족과 통화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두렵다.
특별한 일도 없는데, 왜 전화를 했는지 궁금해할 그 상황이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스탠스를 취하는 편이다.
지난주에 계속 연락이 되지 않는 어머니가 걱정이 됐다.
누나에게 물어보니 집전화가 고장이 났단다.
휴대폰을 켜면 보이스 피싱을 당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엄마는 휴대폰을 꺼놓고 지내신다.
그래도 누나 덕분에 한 시름 놓았다.
내가 그나마 잘하는 것 중에 하나는 생일을 챙기는 것이다.
누나와 매형, 동생의 생일이 되면 상품권을 보낸다.
이럴 때라도 먼저 연락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생일이란 용건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진다.
내가 누나와 동생에게 '들고 갈 수 있는' 크기는
딱 카카오톡 선물하기를 보낼 수 있는 메시지의 길이만큼이다.
<교훈>
가족의 생일은 꼭 챙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