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가면 연락할께

누나가 남긴 것

by X선생

둘러보니 벽은 온통 흰색이었고, 냉장고도 흰색이었다.

정적 속에서 냉장고 소음만 거슬린다.

커튼을 치니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어 재채기가 났다.

가슴이 울리고 기침은 폐의 모든 부분을 두드리며 돌아나왔다.

눈물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코드를 빼버렸다.


물리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몇 통 와있었다.

고열로 인해 일주일 넘게 병원 신세만 지게 된 것이다.

여자 아이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월요일이 되었지만 등교하지 못했다.


"그럼 조만간 연락 드리겠습니다"하는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리며 문이 삐그덕 열렸다.

아직 귀에 핸드폰을 붙여놓은 채 누군가 병실로 들어오고 있다.


"으이그, 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라도 찍었니?

지난 주말에 비 홀딱 맞고 들어왔다며?"


방긋 웃는 사람, 누나였다.

누나는 밝았다.

나보다 다섯살이나 많고, 학교도 1년 일년 일찍 들어가서 학교에서 마주칠 일도 없었다.

게다가 서울에 있는 외국어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일년에 몇 번 보는게 고작이었다.

서울에서 오랫만에 내려온 이유가 내 문병이라니...

누나는 살갑고 다정했지만, 나는 그런 누나에게 어색함을 느꼈다.

나를 보자마자 누나는 나에 대해서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새로 출시한 아이폰3S를 갖고 있었다.

스마트폰은 통화기능이 달린 작은 노트북 컴퓨터와 같다는 말을 들었지만 실제로 써본 적은 없다.

고등학생인 우리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진 않으니까.


"어쩐 일이야. 바쁠텐데."

애꿎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하며 누나의 질문을 뒤로했다. 곁눈질로는 계속 누나의 폰을 보고 있었다.


그날 밤 악몽을 꾸고 일어나 목이 너무 말랐고 물을 마시러 가는 도중 쓰러진 것이다.

체온은 40.8도가 넘었고 구급차를 타고 근처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고 들었다.

물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엄마가 엊그제 병실에 들러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너 폐렴이래.

누나는 집에서 내 속옷과 슬리퍼, 칫솔, 노트북 같은 걸 챙겨와서 주섬주섬 정리하며 말했다.

"떠나기 전에 집에 한번 들를까 했는데, 이렇게 보네."

나란 사람이 참 할일 없어보이고 약해보인다. 그에 비해 누나는 바쁘고 똑똑하고 강하다.


몇 년전에 군대에서 뭔 연구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미국에 간다고 했다.

앞으로 언제 다시 들어오게 될지는 모른다고 했다.

부모님께는 벌써 알려드렸고, 오늘 저녁 출국한단다.

나에게 현금으로 용돈을 50만원이나 쥐어주며 작별인사를 서둘러 했다.


"미국에 가면 연락할께."

"응."


==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한방울도 내리지 않는다.

통증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숨은 깊게 들이쉴 수 없었다.

마치 물 속에 있는 것같았다.

고래는 잠을 자면서도 자신이 물고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갑자기 수면 위로 올라가고 싶어졌는지 창문 잠금장치를 열고 힘껏 위로 밀어올린다.

순간 오른팔에 꽃혀 있던 수액 바늘이 툭하고 빠져버렸다.


나는 누나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공부를 잘했고, 마을 입구에 현수막이 꽤 여러 번 걸렸다는 것밖에는.

신기하게도 부모님은 누나에 대해서 떠벌리는 일도 없었고, 비교하지도 않았다.

현수막도 동네 사람들이나 학교 자체에서 걸어준 것이고, 부모님은 딸 잘키웠다는 칭찬에 쑥쓰러워하셨던것같다.

누나는 공부만 잘한 게 아니다. 과수원 일도 묵묵히 도왔다.

방학때마다 매년 여름 서울에서 내려와 일을 도왔다.

그것도 일주일씩이나, 새벽부터 밤까지.

그리곤 이튿날 새벽 첫차로 올라갔다.

겨울에는 집에 오지 않았다.

한 번은 변호사인지 의사인지 하는 남자친구라는 사람도 왔었던 것같은데, 지금도 만나는지는 알 수 없다.

누나에 대해서 아는 건 이게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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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부모님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생일도 잘 모른다.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모르고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니 오만원짜리 열 장이 손에 쥐어져있었다.

미국 어디에 가는지, 누구랑 가는지, 무슨 일로 가는지 하나도 묻지 않았다.

묻지 못한 것이 아니라 묻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영영 묻지 못할 때가 지나자 묻고 싶어졌다. 비겁한 인간이다.

'대체 누나는 나에 대해 뭘 알고 있을까?'

이제 영영 떠난다고 말하는 누나에 대해 이제야 호기심이 생긴 것같다.

하지만 작별의 문자 하나 보낼 수 없다.

나에게 아이폰도 남기고 갔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다시 사면 되니까 음... 이거 너 써."

이게 그녀의 작별 인사였다.


물리 선생님의 부재중 통화가 생각이 났다.

"괜찮아요 지금은. 엑스레이 한번 더 찍어보고 내일 모레 퇴원 여부 결정한데요." 라고 문자를 보냈다.

10분쯤 후 답신이 왔다.

"다행이구나. 방학때 물리연구 모임을 하나 하는데, 너도 들어올거지? 일단 퇴원해서 학교로 나오면 자세히 얘기해줄께. 메일로 pdf하나 보냈어."

노트북을 열어 선생님이 보낸 메일의 첨부파일을 열었다.

양자역학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온갖 수식이 난무해서 읽을 수 없었다. 마우스로 계속 드래그하다 갑자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고 멈추었다.

양자역학에서 얽힘은 과거에 만난 적이 있는 입자같은 두 물체가, 마치 서로 계속 대화할 수 있듯이 이상한 유대를 유지하는 현상이다. *

그날 밤, 다시 비가 세차게 내렸다.

숨을 쉬고 싶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쌤엔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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