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라는 거짓말

존재하지 않는 통화기록

by X선생

"7월 2일 목요일 오늘의 날씨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대구 뿐만 아니라 서울과 근교를 비롯한 중부 지역 9개 시도에서 폭염 경보가, 그 밖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도 폭염주의보가 발효중입니다.

낮 최고 이온은 대구 38도, 구미 37도, 서울 36도 등 으로 대체로 전날보다 2도 높습니다.

최고 체감 온도는 38도 안팎까지 오르겠고, 한낮 자외선 지수는 "위험함"단계로 예보되었습니다.

내일도 서울은 대체로 청명한 날씨가 예상되며 아침 최저 기온은 22도에서 26도, 낮 최고 기온은 33도에 36도를 보이겠습니다.

이상 날씨 예보였습니다."


'하~ 오늘도 푹푹 찌겠군.'

TV를 꺼버렸다.


입원한지 열흘째 되던 아침, 아니 새벽이었던가.

문을 활짝 밀고 실내화를 저벅저벅 끌고 들어오는 남자.

담당 내과의였다.

내가 간신히 눈을 비비며 몸을 반쯤 일으키려고 하자, 그는 내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짓으로 툭 하고 한 두번 내리며 그대로 있어도 좋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가운을 입고도 호리호리하지만 다부진 골격이 느껴졌다.

내 침상 앞에서 차트를 한참을 들여다보고 팔락팔락 넘긴다.

아무 말없이 몇 분을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알 수없는 용어를 중얼거리자 간호사가 받아적었다.

내 쪽을 보고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비는 또 맞으면 안됩니다."

그는 슬리퍼를 지익지익 끌며 문을 쿵 닫고 나가버렸다.

퇴원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간호사는 뒤따라 나가며 약은 1층 원무과에서 준비해놓을테니 받아가라고 한다.

엄마도 아버지도 오지 않았다.

입원 비용이나 약제비는 이미 계산되어 있었다.

캐리어에 주섬주섬 옷가지등을 챙겨넣고 택시를 잡으러 나왔다.

찌는 듯한 더위에 습한 날씨로 벌써 등에 땀이 흥건하다.

병원 밥은 정말 맛이 없었고, 오늘은 유난히 입맛도 없다.

목도 마른데 아침을 거른 탓인지 기력이 없다.

택시를 타다 갑자기 콜라가 마시고 싶었다.

집에 이대로 도착해버리면 근처에 편의점하나 없기 때문에 여기서 내려야만 한다.

"여기서 세워주세요."

20미터쯤 앞에 보이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목을 축이기로 한다.

"8,800원입니다."

패티가 두 개 들은 치즈버거와 콜라, 양념감자 세트를 주문해 들고 창가에서 가장 거리가 먼 쪽을 골라 앉았다.

멍하게 버거를 입안에 우겨넣으며 핸드폰을 찾았다.

짐가방을 열고 옷가지를 테이블에 쌓으며 한참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젠장, 병원에 두고 왔나.'

짜증이 날 무렵, 누나의 아이폰이 생각이 났다.

'구닥다리 폰에 어차피 잠겨있어서 열지도 못할 텐데 그냥 버린 셈치자'

내 폰에는 전화번호도 거의 없었고, 중요한 메모도 없었다.

사진이나 동영상도 없었다.

그 흔한 셀카 사진 한장도 남기지 않았다.

무관심한 이런 습관이 이럴 땐 도움이 된다.

바로 패스트푸드점 바로 옆에 대리점이 있었고, 기기변경을 신청하기로 했다.

'스마트폰 쓰는 방법은 차차 익히기로 하지.'

핸드폰이 진열되어있는 투명 가판대 위에 누나의 아이폰을 올려놓고 있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뭐지? 해지도 않하고 갔잖아?'

대리점 아저씨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하하... 누나가 저 쓰라고 준거에요."

"받아보세요, 그럼."

전화기 도둑으로 몰릴뻔 한 순간이었기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000-0010-1010

장난같은 이상한 번호였다.

당연히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수화기 속에서 잡음이 들려왔다.

조금 더 자세히 귀를 기울여보니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때 그날 그 빗소리였다.

그 언덕 골목 갈림길 거기서 내리던 빗소리.

청포도 냄새와 그 아이.



=====

그리고 잠에서 깨었다.

거실에 전화벨이 계속 울리고 있지만 받지 못하겠다.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모든 기억은 대체 뭘까.

나는 열일곱 고딩이 아니다.

스물 셋 복학 대학생이다.

그리고 엄마는 그렇다쳐도 아버지는 없다.

적어도 지금은.

왠 빗소리에 여자아이?

그리고 누나는 또 뭐야?

나에겐 누나가 없다. 형제라곤 한 살 터울의 사촌 동생 하나 뿐이다.

과수원은 커녕 시골에 살지도 않는다.

나는 서울을 떠나본 일이 없다.

스마트.. 뭐시기.핸드폰이 그런게 있나.

나도 핸드폰은 있다만 PCS다.

이 빌어먹을 놈은 툭하면 잘 안터진다.

요즘같이 비가 많이 오면 그냥 애물단지다.

도무지 이해가지 않는다.

꿈 자체가 이해가지 않아서가 아니다.

꿈은 언제나 허황되고 바보같으니까.

그런데, 눈물이 흘러내리는 이유는 뭘까.

내 모든 게 사라져버린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

현실로 돌아왔는데, 삶이 없어진듯 아득하다.

시계를 보니 오전 4시를 3분 정도 남기고 있었다.

분명 어젯밤 그러니까 술을 진탕 마시고 새벽 1시쯤 넘어서 한 여자와 같이 내 투룸에 들어왔다. 그녀는 아직도 자고 있다.


머리가 아프다.

숙취 때문인지, 속옷도 입지 않은채 엉덩이를 내쪽으로 하고 코를 고는 여자 때문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생생한 꿈 때문인지.

하여간 신경쓰여 더 잘 수가 없다.

꿈뻑꿈뻑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달랑 두 시간 정도 전에 잠에 들었다 깨었는데 이건 내가 알던 세상과는 너무나 다르다.

누군가의 삶에 잠깐 빙의되었던것일까.

너무 생생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다른 꿈은 이처럼 정밀하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 적이 없다.

난 정말 그때 빗속에 몇 시간을 서 있었고 고열과 통증으로 몇 일동안 아파 잠도 이루지 못했다. 아파 보면 안다.

일분 일초가 얼마나 더디 가는지... 그게 고작 두 시간이라니.

내가 누웠던 자리가 땀으로 축축하다.


힘겹게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와본다.

부재중 통화는 밴드부 더로부터 온것이었다.

음성 메시지가 녹음되어있었다.

"야, 지우연. 공연이 몇 일안남았는데 너 왜 아직도 가사 안보내? 어제까지 보낸다고 했잖아. 애들한테 인기 좀 있다고 너무 게으른거 아니냐? 날씨는 좀 안 좋지만 어쨌든 저녁 7시까지 연습실로 튀어와!!!"

나는 록밴드 리드 보컬겸 작사를 맡고 있었다.

멜로디에 맞는 가사를 쓰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찬물에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았다.

긴 머리에 날카로운 코, 남성적이지만 매끄러운 턱선, 그리고 쌍커풀은 있지만약간은 퇴폐적이게 가로로 길고 가는 눈매, 그 사이 보이는 푸른 눈동자와 살짝 비웃는 듯한 입술.

매일 보던 얼굴이다.

여자들에게 나는 꽤 인기 있었다.

'그래 내가 좀 잘생기긴 했지...'

'꿈 속에서도 자아도취에 빠지셨나. 얼굴을 쳐다보는 버릇은 못버렸구만. 그런데 그리 봐줄만한 얼굴은 아니던데?'

혼자서 키득키득 웃어본다.

키가 좀 아쉽긴 했다.

강렬한 무대매너와 카리스마로 인기는 누리고 있었지만 내심 작은 키라는 콤플렉스는 따라다니고 있었다.

170이 될락말락해서 남몰래 언제나 깔창을 넣고 다니는게 습관이었다.

남들은 심지어 밴드부 형들까지 내가 173인지 안다.

꿈 속의 나는 지금의 나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지도 않았고 근육도 없고 깡 마른 체형이었지만 키가 컸었던 것같았는데...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든다.


"키 컸으면... 키.컸으면... 크크크크"

배꼽을 잡고 낄낄대다 거울에 비친 다시 내 모습을 보았을 땐 너무나 오싹했다.

매사에 진지한 점이란 노래할 때 이외에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쿨한 나였다.

'거짓이야 너는'

분명히 누군가 노려보는 느낌이었다.

1998년 7월 4일이다.

우중충하고 어둑어둑한 새벽의 토요일.

무서운 생각이 들어 방에 불을 환하게 켜고 TV를 틀었다.

TV를 틀었다. JBS1 뉴스에서 예보가 나오고 있었다.

두꺼운 브라운관이 거실을 환하게 비추자 숨이 절로 나왔다.

'요새 너무 과음을 했나'


"사흘 넘게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고 있는 중부지방은 오늘 밤까지 비가 온 뒤 다음 날 아침 일시적으로 그치겠지만 오후에 다시 비가 올 예정입니다. 특히 많은 비가 내린 서울 경기 지방 등에서는 주택과 상가가 침수되며 비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호우가 지난 뒤 집에 도착하면 바로 들어가지 말고 붕괴 가능성이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합니다. 파손된 상하수도나 축대·도로가 있으면 해당 시·군·구청 등에 연락하고, 물에 잠긴 집안은 가스가 차 있을 수 있으니 환기를 시켜야 합니다...


50년만의 물난리.

폭우가 계속되고 있었고, 시내의 저지대와 도로는 모두 물에 잠겨 대중교통도 마비된 상태다.

전자렌지 다이얼을 돌려 낮에 먹다만 부리또를 데운다.

전용 접시대가 노란 불빛을 내며 빙글빙글 천천히 돌다 삑 삑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음식을 씹으며 창문을 살짝 열어 제쳐본다.

창밖에는 맨홀 근처의 구정물이 굉음을 내며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다.

'대체 저 많은 비는 어디서 온걸까'

빗속에 흠뻑 젖어있던, 꿈속의 여자 아이가 자꾸만 떠올랐다.

비가 없었고 있다가 다시 없다 다시 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숨을 내쉰다.

기가 마치 향처럼 아주 가늘고 곧게 피워오르고 있다.

'그래. 이걸 가사로 쓰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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