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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May 10. 2023

몰락한 귀족은 어떻게 살아갈까

끄적끄적

내가 어릴 때 이모 친구 중에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하는 분이 있었다.

내게는 어른으로 보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분도 대학생 때라...

이모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거나 밖에서 모일 때,

나는 이모들 얘기에 귀를 쫑긋했었다.


그분 어머니는 북한의 상당한 부잣집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는데 전쟁으로 월남하게 되었으니.

남한에 내려온 아버지는 어렵사리 학교 교사로 일하게 되었고.

박봉으로 자식들을 키우며 쪼들리고 살아야 했다.

사람이 아무리 적응을 잘하더라도 몸에 밴 습관이 금세 사라지지 않으니.

그 어머니는 가난뱅이의 현실과 성장기의 부유한 습관 사이를 갈팡질팡 하면서,

이미 조촐한 살림 형편에 익숙해진 자식들 눈 때때로 납득이 안 가는 소비 행태를 보이셨던 것 같다.

들을 때마다 박장대소하던 일화들.



예전에 동구권 나라에는 귀족들이 득세했던 것 같다.

산업혁명이나 민주주의에서 제외된 지역으로,

소수의 중산층-즉 의사나 법률가, 상공인들-은 대개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부와 권력은 크고 작은 귀족들이 차지했으며.

귀족들의 영지에서 소작인으로 일하는 농민들이 대다수였다고 한다.

기근이 들면 농민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고,

그래서 일찍이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이 많았다.

전후 동구권이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공산화되는 데는 지정학적 요인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심하게 불평등하고 중산층이 얇은,

이런 면이 크게 작용했겠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세계대전과 공산화가 일어나는 기간에 동구권 귀족들은 몰락하는데.

일부 재산을 건져서 서구권으로 넘어온 귀족들도 있었지만.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영지를 내버리거나 빼앗기고 가진 것 없이 서구권으로 오게 된 귀족들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로 인척, 친척 관계로 얽힌 서구 쪽 귀족 집에 얹혀살았지만,

서구의 귀족들도 가세가 기울어가는 형편이라 오래지 않아 바깥세상으로 쫓겨나게 되었으니.

그 자식 중 한 사람이 하늘과 땅 수준으로 달라진 부모세대와 자식 세대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재미나게 풀어낸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조상 때부터 오랫동안 직접 생산활동을 하지 않고 살아온,

그러나 세상의 변화로 더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나 또한 비슷한 부류이기에,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방식과 습관과 무능함으로 도대체 생계를 어떻게 해결하나, 궁금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가 멸망하면서 권력층의 대대적인 이동이 있었다.

가치관, 정치 체제와 경제 활동 방식이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졌다.

최고위층은 화족이라며 특권층에 편입되고 재산권도 상당히 보장받았지만,

그 아래 무사 계급은 무장해제,

얼마간의 채권을 받고는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보장되었던 생계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새로운 경제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무사계급은 그마저 잃고 대부분 당대에 빈털터리가 되었다는데.

에도시대에 무사계급은 생산활동에 종사할 수 없었고.

녹봉으로 받는 쌀이나 봉토의 생산물도 반드시 중개인을 통해 돈으로 바꾸었으니.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자부심과 쓸모없는 교양뿐,

노동을 해본 적도, 남과 이익을 다퉈본 적도 없는 무사계급은,

가만히 방에 들어앉아 하늘의 온정만 기다렸겠지.


자식 대에 와서 크게 성공한 기업가도 생기고,

유명한 학자, 문필가들이 다수 나타나는데.

당대에는 그저 속절없이 추락하면서 "옛날의 금잔디"만 하염없이 외쳤나 보더라.

몰락한 무사계급의 어느 문필가가 쓴 글에서

"글 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다", 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에도 막부가 망하던 해에 태어난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글을 읽다 보면,

에도시대의 정연한 질서를 그리워하고 부국강병을 외치는 메이지 시대 가치관을 경시하는 느낌을 받는다.

막상 나쓰메 소세키 집안은 지역 유지 정도의 평민이었는데,

정신적으로는 무사계급이었던 듯.



운명이 우리를 어떤 자리에 내동댕이치더라도 사람은 살아간다.

영국에서 늙은 새 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저 자리가 얼마나 갈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막강했던 권력을 내려놓고는,

착실하게 구경거리와 홍보대사 역할을 수행하면서 수백 년 왕실을 유지하는 그 적응력이 놀랍기도 하면서.

저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지만.


다른 방식의 삶은 알지 못할 테니.

고민은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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