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poor, but be rich
책을 기록함
<아메리칸>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민음사
사람은 단독자로서 자신을 이해하고 인식하기도 하지만
종종 다른 것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기도 한다.
헨리 제임스는 어릴 때부터 미국과 유럽을 오가면서,
과거의 영광을 후광으로 이고 있는 콧대 높은 유럽 상류층이 부유한 미국을 바라보는 복잡한 시선을 느끼면서.
양 문화권의 차이와 간격과 서로 간의 질시를 곰곰이 사유하고 분석했던가 보았다.
그의 장편소설 <아메리칸>은 산업부국으로 치고 올라오는 19세기 후반의 미국과,
하향세에 들어선 유럽의 문화와 가치관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번영해 온 선조의 무게에 짓눌린 유럽과
가볍게 날아오르는 경쾌하고 다소 경박한 미국.
미국인 부호 뉴만과 프랑스 귀족 발렌틴은 동년배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와 양안의 문화를 토로한다.
가난하게 태어나 열네 살부터 생존을 위해 여린 어깨를 들먹이며 거리로 나가 저녁거리를 벌어야(31쪽) 했던 뉴만은,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모은 서른여섯 살 미국인이다.
갑자기 사업에 넌더리가 나서,
"복잡한 일은 잊어버리고, 자신을 돌아보며, 세상을 전전하면서 멋진 시간을 보내려고 해. 그러다 마음 내키면 아내를 맞이할 수도 있고." (30쪽)- 하는 생각으로 유럽으로 왔다.
뉴만이 살아온 시간은 순탄치 않았다
어느 땐 실패가 회피할 수 없는 자신의 몫인 듯했고, 불운이 동반자가 되었으며, 그가 손을 댄다면 무엇이든 황금이 아니라 재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깡그리 신용을 잃고 단돈 1달러도 벌지 못한 채, 낯선 도시에서 서러움을 달랠 한 푼의 돈도 없이 해 질 녘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음울했던 시기에 그는 오직 한 가지 단순하고 현실적인 충동만을 가졌는데, 그것은 자신의 표현대로, 무엇인가 해내고 말겠다는 욕구였다. 결국 뉴만은 그렇게 했고, 악전고투 끝에 성공을 거두어 큰돈을 벌게 되었다.
뉴만에게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돈을 축적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숨김없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대담하게 기회를 포착하여 오직 재산을 모으는 데 있었지만, 재산이 많을수록 더욱 좋다는 생각이 자신의 시야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만족시켰다. 그는 돈의 사용처와, 거대한 재산을 모으는 데 성공한 삶을 앞으로 어떻게 보내야 될지에 대해서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이르도록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뉴만은 공개된 게임이나 다름없는 인생에서 커다란 모험을 벌여 마침내 승리와 보답을 차지했기 때문에, 앞으로 무엇을 해야 될까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 뉴만은 인생에 대해 자신의 여태껏 꿈꾸어 온 것보다 더욱 많은 답변이 가능하리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31, 32, 33쪽 부분들)
쉽지 않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룬 성공이기에 뉴만은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도 낙관적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성공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선 마치 기념비 위의 동상처럼 횃대에 걸터앉은 아름다운 여성이 있어야 해요. 그녀는 아름다운 만큼이나 착하고, 착한 만큼 영리해야겠죠. 난 아내에게 많은 것을 베풀 수 있고, 스스로 주저 없이 아내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겠소. 그녀는 여성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질 테고, 나한테 과분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영리하고 현명할 테지만, 그래도 난 더욱 만족할 거요. 한마디로 나는 시장에서 가장 좋은 상품을 손에 넣고 싶소." (55쪽)
, 하는 기대를 갖는다.
수백 년에 이르는 유서 깊은 가문의 차남 발렌틴 드 벨가드 백작은 공손하고 세련된 신사인데.
물질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은 채 변화해 가는 세상에서 금기만 많은 귀족 신분은 오히려 발목을 조이는 쇠사슬이다.
"... 나는 실패작이니까..."라고 말한다.
"나는 높은 곳에서 추락하지도 않았고, 요란하게 실패하지도 않았거든요. 당신은 분명히 성공한 사람이겠죠. 재산을 모았고, 건물을 지었으며, 게다가 재력과 상업적 수단을 구비했으니까요. 당신은 안락한 곳을 찾을 때까지 세상을 두루 여행할 수 있고, 이미 획득한 안락을 누리며 편안히 쉴 수도 있어요. 사실 그렇지 않나요? 그렇다면 정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봐요. 여기 있는 나를 두고요. 난 어떤 것도 이룬 게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135쪽)
하지 말아야 할 것, 낮아지면 안 된다는 강박증에 걸린 귀족 신분 발렌틴의 눈에는,
스스로 일어나야만 했던 적수공권의 뉴만이 거리낄 것 없는 가능성 그 자체로 보인다.
"아, 하지만 당신의 가난이 곧 재산이었죠. 당신은 미국인이므로 태어날 때 상태 그대로 머문다는 게 불가능해요. 그리고 가난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내 말이 맞겠죠!- 부자가 돼야 한다는 건 피할 수 없는 노릇이오. 당신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었고, 주위를 둘러보면 세상이 그저 다가가 붙잡기만 하면 되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손을 떼시오!>라는 딱지가 붙어 있더군요. 그런데 기막힌 일은 그것이 단지 내게만 겨누어져 있다는 거였어요. 나는 벨가드 가문에 속하기 때문에 정치에 뛰어들 수도 없었고요, 우리 가문은 정치 가문을 싫어했으니까요, 게다가 둔치였기 때문에 문학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죠. 나는 부유한 소녀와 결혼할 수도 없었답니다. 벨가드 가문에서 평민과 결혼한 사람은 누구도 없었으니 내가 시작한다는 게 적절치 않았거든요. 그래도 어딘가에 닻을 내려야만 되었죠. 하지만 우리 계층에서 결혼할 수 있는 상속녀란 그냥 얻을 수 있을 게 아니랍니다. 말하자면, 가문이나 재산이 비등해야 돼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교황을 위해 싸우러 가는 것뿐이었어요. 나는 엄숙하게 그 일을 수행하다 신의 사도처럼 카스텔피달도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죠. 그건 하느님이나 나한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어요. …"(138, 139쪽)
허심탄회하고 진취적인 생각을 가진 차남 발렌틴과 달리,
뉴만은 프랑스와 영국의 순수 귀족 혈통인 벨가드 가문으로부터 결국 싸늘한 배척을 받고 말지만.
그래서 혈통과 세련된 문화를 자랑하는 음흉한 유럽에 순진한 신흥부자 미국은 크게 마음을 상하고 마는데.
좁게는 개인 간에,
넓게는 사회와 국가, 종교 등 일정한 범주가 다른 유형과 마주칠 때 서로는 우열을 겨루며 승부하려 들기 쉬운데.
서로의 표면과 이면, 외양과 내면을 찬찬히 파악하고 본질을 탐색하며.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이해하고 공평하게 인정하려는 너그러운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다른 사람 또는 다른 문화에서 배울 점을 찾고 협력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