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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Aug 12. 2023

인생이라는 고해를 건너면서

끄적끄적

내가 남의 하소연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결코 아닌데.

이상하게 우연히 마주친 낯선 여자들이 내게 깊은 속얘기를 털어놓을 때가 가끔 있다.

알고 지내는 가까운 사람보다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에게 힘든 마음을 털어놓기가 더 쉬울지도 모르지.



예전에, 제주도 이주 붐이 불기 바로 전에,

제주도에서 몇 년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어머니와 나눈 적이 있었다.

현실감각 없는 모녀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아...

급기야는 집 보러 제주도에 갔다.

처음부터 외딴곳은 무리라서 제주시 신시가지 아파트들을 둘러보았는데.

음, 집들을 보러 다니는 동안 제주도로 이주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현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부동산 중개업소를 세 군데쯤 방문했던 것 같다.

한 곳은 우리가 부동산 투자에 관심 있는 줄 아는지 눈치 없이 보여주는 집마다 이 집은 사면 오른다, 는 말만 반복했는데.

서울에서 오셨다는 중년의 여성 중개업자가 기억에 남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제주살이가 생각처럼 낭만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분명히 일러주시면서,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사는 집과 제주도 분들이 사는 집의 다른 점 등 제주도 생활에 관한 정보를 많이 주셨다.

외모가 단정하지만 표정이 어두워 보였던 그분은 운전하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는데.


결혼하고 얼마 뒤에 어린 딸을 데리고 이혼한 그분은  무조건 서울에서 멀어지고 싶어서 제주도로 오셨단다.

제주도에서 자리 잡기까지 십 년 넘는 시간, 무척이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제는 중학생이 된 딸이 너무 힘들게 해서 심정이 몹시 괴롭다고 하셨다.

뒷자리에 앉은 우리 어머니께는 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건조하게 조곤조곤 사정을 털어놓으셨는데.

조용조용한 그분의 말이 흐느낌으로 들리더라.

집을 볼수록 우리의 제주도 살이는 멀어져 가서 수고하신 그분께 보답을 못할 것 같아 미안했는데.

헤어질 때 그분은 혼자 삭이던 괴로움을 털어놓으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면서 되려 고맙다고 하셨다.


비슷한 경험을 옷집에서도 한 적이 있었다.

여자들 옷과 장신구를 파는 작은 편집매장이었는데,

내가 뭔가를 사고 포장하는 동안 물건이 잘 팔리느냐, 하는 스몰토크를 했던 것 같다.

활발하고 밝은 표정이었던 그분은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좋은 대학 나와 직장 생활하다가 부잣집 아들을 만나 결혼했다.

시댁에서 살게 되었고 아들을 낳으면서 직장도 그만두었는데.

남편 포함 시댁 식구들 모두 돈의 노예 같은 지극히 속물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라...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갓난쟁이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왔단다.

감히 네가 날 버려?, 하면서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도록 아이 아버지는 양육비 한 푼 주지 않았고.

장사도 잘 안 되어서 유난히 똑똑한 아들 학원비도 다급한 형편인데.

지난 주말에 아버지 만나 할아버지 집에서 하루 자고 온 아들 손에는 고급 브랜드 옷과 신발만 잔뜩 들려있었다.

너네 엄마는 수준 떨어져서 이런 것도 안 사주지?, 험담까지  보태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다르니 이혼하기 천만다행이죠,

당장 먹고살 일이 캄캄하지만요!, 하더라.



그분들도 나처럼 노년기에 들어서는 나이가 되었을 텐데.

인생의 굽이굽이,

낯선 이에게 털어놓을 만큼 넘쳐흘렀던 괴로움일랑 옛이야기가 되어서

이제는 행복하고 편안하시길요.


아, 자녀분들도 잘 자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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