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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기억하는 과거

끄적끄적

by 기차는 달려가고

어머니가 다니셨던 병원 근처에 갈 일이 있었다.

안타까움과 체념과 인내심과 약간의 희망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이 고여있는 곳.

굳이 피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길 곳도 아니다.

다만 장소는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병원을 가로질러 큰길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방향을 잡고 뚜벅뚜벅 걸었다.

멍하니, 정신줄은 내려놓고.



어, 그런데 정신 차려 보니 내가 가려던 큰길이 아니라 다른 곳에 와있네?

쌩쌩 부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 왜 이리로 왔을까, 주위를 둘러보려니,

딱 생각이 났다.

여기는 택시 타는 곳.

어머니와 병원 건물을 나와서 택시를 타기 위해 늘 이곳으로 움직였었다.

그러니까 내 몸은 여러 해 전에 반복했던 동선을 기억하고는.

내가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자 예전에 해왔던 대로,

병원 건물을 나서서 택시 타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했던 거였다.

뇌는 충실하다.


그러니까 일단 몸에 회로가 형성될 만큼 반복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 기억을 의도적으로 초기화하고 새로운 행동을 시도하지 않는 한,

몸은 해왔던 습관대로 행동한다.

몰랐던 사실은 아니지만 내게서 실현된 결과를 보니 앗, 각성이 든달까.



생각이나 행동은 상황이 바뀐다고 저절로 따라가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효력이 다한 지난 행동 습관을 지우고,

바뀐 현실에 따라 또는 새로 습득한 지식에 맞춰 개정하고 바꿔주며,

그에 적절한 새로운 생각과 행동으로 양식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과거는 몸에 각인된다.


제 아무리 old money 인 척,

고귀한 혈통인 듯 사기 치면서.

과거를 숨기고 학벌을 세탁하며 옷을 갈아입고

외모를 갈아엎으면서 딴 인물로 가장하지만.

입에 밴 말투나 무심코 하는 행동거지가 살아온 시간을 말해준다.


방을 청소하고 물건을 정리하듯이,

내 생각과 언행도 수시로 점검하고 고쳐놓아야겠다.

아, 바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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