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차리셨던 밥상
학교 급식이 생겨 정말 편해졌다.
소풍 날도 도시락을 맞춘다니.
우리 학교 다닐 때는 이른 아침부터 엄마가 도시락을 싸주지 않으면 그날은 굶는 줄 알았었다.
팥쥐 엄마나,
쌀독이 빈 집만 도시락을 안 싸주는 걸로 생각했지.
(사실은 도시락이 없는 등교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외환위기 전 우리 집이 대체로 한가로웠던 시절에.
외출에서 돌아오니 식탁에 차려진 밥상에는 어머니가 만드신 조각보가 덮여있었고 옆에는 어머니 메모가 놓여 있었다.
'국은 데우고, 냉장고 안에 재운 고기는 볶고, 맛있게 드시오..' 하는.
학생 시절 어머니가 만든 꽃무늬 주머니에 싸인 도시락을 펼쳤을 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도시락
제각각 다른 성격과 취향을 가진 우리 집 아이들은 당연히 입맛도 전혀 달라서,
어머니는 아침마다 도시락 반찬으로 고심하셨다.
하나 입맛에 맞추면 다른 하나가 차별 대우니 어쩌니 쫑알거리니.
싸 주는 대로 먹으라는 우격다짐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온순한 어머니는,
아침마다 아이들 도시락 반찬을 각각 다르게 만들어야 하는 호된 자식 시집살이를 하셨다.
다른 친구들은 도시락 반찬으로 주로 라면 봉지에 넣어 노란 고무줄로 챙챙 묶은 (집에서) 구운 김,
국물이 줄줄 흐르는 김치에, 밥 위에 얹은 계란 프라이.
오징어채 볶음이나 콩자반 같은 밑반찬을 주로 가져왔는데.
우리 어머니는 촉촉하거나 바싹 마른,
고기와 생선과 채소가 골고루 들어 있는 다양한 반찬으로 매일 다른 도시락을 만들어 주셨다.
초등학교 때는 혼식 검사가 있어서 잡곡밥을 싸가야 했었는데,
편식쟁이였던 나는 껄끄러운 보리밥을 싫어했으니.
어머니는 갖가지 콩이나 좁쌀, 팥으로 매일 재료를 바꾸어가면서 혼식 검사에도 무사하고 내가 먹을만한 밥을 싸 주시느라 고생하셨다.
몸이 안 좋을 때는 갖가지 죽이나 국을 싸주셨고.
비린내가 덜 한 흰살생선을 물기 없이 졸이거나 바짝 구워서 살만 발라 넣어 주시기도 하고.
고기는 볶거나 튀기거나 다지거나.
혹 마른반찬으로 목이 마를 새라 조금조금 하게 잘라 속을 파내 그 안을 소고기 볶음 고추장으로 채운 시원한 오이 토막들.
불고기를 물기 없이 바싹 구워 작게 뜯은 상추에 꼭꼭 사서 쌈장과 함께 별도의 반찬 통에 넣어 주신 날이면 화창한 봄날, 들판으로 나들이 나온 화사한 기분이 되었다.
볶은 소고기와 시금치, 계란 지단에 단무지를 넣는 천편일률 김밥뿐이었던 시절에 우리 어머니는,
속을 털어 물기 없이 볶아 자잘하게 자른 김치, 매콤한 다진 고추, 시원한 오이 같은 남다른 속재료로 색다른 김밥을 만들어 주셨다.
종종 삶은 계란 노른자를 갈아서 덮은 작은 주먹밥으로,
채소와 고기를 넣은 볶음밥으로,
또 거기에 계란 프라이를 얹고 토마토소스를 뿌린 오므라이스로 밥은 모양을 바꾸었고.
가끔은 샐러드와 샌드위치도 도시락의 메뉴였다.
나는 가방이 무겁다고 교과서를 빼먹고 다녔던 배짱이었는데, 도시락 보따리는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여름에는 가벼운 망사나 꽃무늬 옥양목으로,
겨울이면 털실로 어머니가 짜주신 도시락 주머니를, 나는 내 것을 구별하여 꼭 내 것만 들고 다녔다.
몸이 안 좋다고 학교를 결석한 날이면 빈둥빈둥 교과서는 곁눈질도 안 했지만 방에 길게 누워 아침에 싸 놓은 도시락은 즐겁게 까먹었지.
내 소풍날은 물론이고, 날짜가 다른 형제들의 소풍날은 내게도 소풍날이었다.
소풍날의 성찬으로 무거운 도시락을 들고 학교 가는 발걸음은 룰루랄라 흥겹기만 했단다.
하지만 즐거운 날만 있었을까.
잠이 모자라 괜히 아침부터 어머니에게 골을 내고 볼이 부어 집을 나서는 날에는,
뾰족뾰족 인상 쓰는 내 뒤에서 어머니가 건네주시는 도시락 주머니는 시선을 비낀 채 못 이기는 척 받아 들었다.
짜증을 부린 뒤끝이라 머쓱한 마음에 빈 속으로 집을 나왔으니 배가 고팠다.
첫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서둘러 도시락을 펼치고 허겁지겁 밥을 먹다 보면,
문득 죄 없는 어머니에게 부린 짜증이 미안해지고 그만큼 밖에 안 되는 스스로에 자책이 들면서 도시락 위에는 똑똑 눈물방울이 떨어지는데.
그래도 먹, 으, 면, 서,
울었다.
한결같이 넉넉한 반찬이 입맛을 당기는 맛있는 도시락을 챙겨 주신 부모님 덕분에,
어이어이 도시락 먹는 재미로 싫어했던 학교를 16년 무사히 다닐 수 있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식구가 많아 여러 가지 반찬을 많이씩 만드는 집이어서.
단출하게 자기 식구만 사는 친구들의 경우와는 달랐겠지.
* 식모 언니들
우리 어릴 때는 많은 집들이 시골에서 올라온 처녀들에게 집안일을 시켰다.
인건비가 싼 시절이었고 농촌에는 일거리는 없이 전후에 태어난 청소년기 인구가 넘쳤으니.
친척들 소개로 또는 고향 사람 하나가 줄줄이 이끌어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댓 살짜리 소녀들이 도시로 식모 일을 하러 왔다.
이전에는 단순히 중립적인 의미였을 ‘식모‘라는 단어에 점점 비하하는 뉘앙스가 담기면서,
듣기 좋으라고 공식적으로는 가정부라 불렀지만 뒤에서 말할 때는 흔히들 식모라 했다.
많은 집의 식모 언니들이 쉬는 날도 없이 떠나온 고향에도 못 가보고 새벽부터 밤까지 종일 일을 했는데.
주인 잘못 만나면 월급은 구경도 못 한 채 도망치기도 했고 사악한 집에 들어가서는 험한 꼴을 당하기도 했었다.
고되고 외로운 처지라 가끔은 (주로 실패하는) 연애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지.
우리 집은 속초에 계시던 이모할머니가 식모 언니들의 주공급원이어서 속초에서 온 언니들이 여럿 지나갔다.
그중에 정희 언니는 지금도 기억한다.
억척스럽게 일도 잘하고 말 안 듣는 우리한테 빽빽 소리도 잘 질러대던 씩씩하고 눈이 예쁜 언니.
받은 월급 모아서 오빠 취직시켜줬다던데 (그때는 공공기업이라도 연줄이 있거나, 목돈을 줘야 취직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겠네.
평생 얼마나 열심히 살았을까.
70년대 들어 공장이 많아지면서 처녀들은 서러운 남의집살이보다 일이 고되더라도 또래가 많은 공장으로 몰려가고 나이 든 아줌마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도 시골에서 올라온 언니들의 시대가 끝나자 아줌마들이 들어왔다.
주먹질이 일상인 남편에게서 도망친 아기 엄마가 젖먹이를 업고 일한 적도 있었고.
혼자된 부인이 자식들 학비 대느라 자식들만 집에 두고 와서는 밤마다 할머니 붙들고 자식들 걱정으로 눈물 바람을 하기도 하고 그랬다.
80년대가 지나가면서는 집에 상주하는 아줌마들은 줄어들고 출퇴근하는 파출부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엄마들 중에는 식모 언니에게 살림을 전부 맡기고 매일매일 외출로 바쁜 주부들이 꽤 있었다.
이 사회의 엘리트인 아버지들이 입신양명으로 몸을 불사르는 동안
엄마들은 요리 학원으로, 계와 동창회로 활발한 사교생활을 하시다가,
자식들 좋은 학교 보낸다고 유명하다는 과외선생을 구하고,
남편의 승진을 위해 상관 부인들을 찾아다녔으며.
소문에 빠르신 분들이라 강 건너 황무지에 지어지는 아파트 분양을 받으러 다니면서 욕망을 불태우고 재능도 살렸다.
그렇게 나름대로 자녀교육과 가정경제에 헌신을 해서는 누구누구는 말죽거리에 땅을 사서 부자가 되었다 더라- 하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지.
우리 어머니는 등을 떠밀어도 집에 있을 사람인데 더구나 아버지는 여자들이 (수다스럽게) 몰려다니는 꼴을 못 보시는 분이었으니,
장을 보거나 가족들과 함께 나가는 외출 말고는 어머니는 늘 집에 계셨다.
우리는 엄마는 늘 집에 계시려니,
언제나 음식은 어머니가 하시려니,
우리들 도시락은 당연히 엄마가 싸주시려니,
집에는 항상 엄마가 만드신 맛있는 음식들이 우리를 기다리려니, 하며 자랐다.
* 도시락의 여운
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방랑자를 자처했던 젊은 시절.
길고 짧은 여행길에 꼬박꼬박 먹을 것들을 챙겨 다녔다.
무겁다고 옷가지는 빼더라도 준비한 먹을 것들은 다 들고 다녔다.
밤과 대추. 양갱과 떡. 과일과 과자.
물론 볶음 고추장이나 북어 보푸라기 같은 밑반찬과 당장 먹을 도시락도.
밍밍한 기내식 대신 어머니가 싸주신 맛있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채우고.
달리는 기차에서 이국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오독오독 누룽지를 씹고, 요리조리 대추씨를 발라내고.
오물오물 밤을 깨물며 좁은 좌석에서 지루한 이동 시간을 견딘다.
세상 어디 간들 맛난 음식이 없을까?
그 땅의 음식을 그 자리에서 맛보는 기회는 기꺼이 환영하지만.
나에게 집이란 곧 안전과 편안함이어서 낯선 땅에 두려움 없이 뛰어드는 용기는 나의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덕분이리라.
내 손에 든 집의 작은 음식 보따리는,
마치 유목민이 사막을 헤매는 동안 낙타 등에 매단 식량 주머니 같이.
낯선 거리에 내린 나에게 집에서부터 풀며 나온 실타래처럼, 집의 안전함으로 나를 이어주는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