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통 정원들을 해설한 책을 읽었다.
조선시대 3대 민간정원이라는 보길도 부용동 원림, 담양 소쇄원 원림, 영양 서석지를 비롯해 수십 개의 정원을 소개하는 책이다.
전통 정원은 요새 정원들처럼 그저 보기에 좋은 조경을 넘어서,
유교적 세계관이 함축된 이상향을 눈앞에 실현하는 행위다.
그래서 전문가가 따로 있던 게 아니고
주인이 긴 시간을 들여 직접 장소를 찾아내고, 정원을 설계하고, 공사과정을 지휘했으며.
고된 조성 노동을 스스로 해낸 경우도 있다.
윤선도의 보길도 원림은 규모가 크다.
관직에서 활약도 크게 했지만 풍파도 많이 겪은 윤선도는 중앙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보길도라는 아름다운 장소에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을 건설한다.
집안이 재정적으로 탄탄하니 자신의 세계관과 미학을 펼치는데 물질적으로 거리낌이 없었겠다.
소쇄원은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변 산세를 차경해서 시야는 넓은데 막상 울타리 안 면적은 넓지 않다.
소쇄원을 조성한 양산보는 윤선도처럼 집안이 부유하거나 관직을 하지 않은,
기묘사화로 낙향한 조촐한 양반집안 출신이다.
다만 맑고 깨끗한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조성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20대 초반에 마땅한 장소를 찾아내고 정원의 청사진을 그렸다.
이에 호응한 주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뒷받침해서 20년이 넘는 동안 하나하나 정원을 완성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하는데 재화가 필요한 건 맞지만 그게 반드시 자신의 재력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먼저 이상 세계를 꿈꾸어야 하고.
그 내용을 채워야 하며.
아귀다툼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세계의 실현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맞다!
이건 백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관직에 있으면 매일매일 쏟아지는 업무와 자리보전과 윗사람 눈치 보느라 머리 빌 새가 없지.
그러니 백수일 때,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름을 생각하고, 이상향을 꿈꿀 수 있다.
그리고 무모한 행위에 도전할 수 있지.
백수여,
꿈을 꾸라.
백수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