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유럽 여행에서는 비엔나의 후배 집을 베이스캠프로 삼았었다.
두 달을 꽉 채운 여행의 상당 기간, 후배 집에 큰 짐은 두고 작은 가방을 들고 유럽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며칠 여행을 다니다 후배 집에 가서 쉬면서 비엔나를 슬슬 구경하거나,
아니면 늦잠을 자고 실컷 게으름을 피우다가 늦은 오후나 되어 슬렁슬렁 동네 한 바퀴 돌거나.
번화가에서 지하철 몇 정거장 거리에 있던 후배네 동네는 조용한 주택가였다.
한 100년은 넘지 않았을까, 싶던
비슷하게 생긴, 앞면이 좁은 6~7층 정도의 공동 주택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골목이었다.
길에 붙어있는 육중한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면 작은 로비와 둥그렇게 휜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낑낑 올라가 복도에 늘어선 방문 중 하나를 열면 후배의 원룸이었다.
밤에도 환하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대부분의 서울 동네들과 달리 그 동네는 해가 지면 어둡고 인적이 끊겼다.
낮에도 간혹 오가는 사람이 보일까, 대체로 한적했고.
주말에는 물론 가게들이 문을 열지 않았고. 평일에도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아서 늘 먹을 것을 미리미리 준비해두어야 했다.
동네는 위험하지도 않았고,
외국인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오스트리아 중산층이 사는 지역으로 보였다.
처음에 동네가 만들어질 때도 아마 중산층 동네였을 것이다.
집들은 당시 부유한 주택을 흉내 내어 높은 천장과 곡선으로 돌아가는 계단을 가졌지만.
주택 건물은 대단히 기능적이고 실용적일 뿐, 고급스러운 치장이나 여유 있는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오래된 동네는 슬럼화 되지 않고 틀을 유지한 채 고치고 바꾸면서 시대의 흐름에 적응해왔더라.
집 앞에 아랍 식당이 있어서 후배랑 갔는데 먹은 음식 중에 콩을 갈아 끓인 수프가 기억난다.
말로는 음식이 괜찮다면서도 움직임이 활발하지 않은 내 숟가락을 보고 후배는 깔깔,
언니 입맛에 안 맞는구나, 말했었지.
비엔나에서 베토벤은 수십 번 이사를 다녔다는데,
내가 갔던 베토벤이 살았다는 집은 특별해 보이지 않던, 간결하고 기능적인 건물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것만 있는 사각형의 집.
그 별다를 것 없는 동네, 평범한 집을 일부러 찾아가는 이유는 베토벤이라는 한 인물 때문이겠지.
베토벤의 자취가 있어 그 동네, 그 집은 특별함을 얻었다.
그래서 어떤 소설이 유명해지면 사람들은 실제의 세상에서 소설 속의 구체적인 형상을 찾으니,
가상의 장소는 현실에서 존재를 얻는다.
사람들의 이상향을 그린 소설에 나오는 "샹그릴라"라는 가상의 장소는,
중국에서 지명까지 바꾸면서 한 지역을 실재하는 샹그릴라로 만들어버렸고.
셜록 홈스의 '베이커가 221b'라는 픽션의 지번은 기어이 런던의 한 건물에 실제의 지번을 붙이고야 말았다.
인기 절정인 유명인의 집들을 관광버스로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니.
어떤 평범한 장소는 '스토리'를 가지면서 특별한 곳이 된다.
꼭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소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어떤 '이야기'를 가지면서 보통의 장소는 특별한 곳이 된다.
우리가 찾아가는 관광지 또는 유명한 장소는 아름다운 풍광과 멋진 건축물로 인해 이름을 알린 곳이 많지만.
적지 않은 장소가 어떤 이야기로 인해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 주고,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거리를 꾸미고 솜씨 좋은 식당과 카페가 장사를 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니 그곳은 더, 더 유명해지고.
뭐 이런 순서로 유명한 곳, 특별한 장소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기다림과 입장료를 지불하면서 사람들은 그곳에 왔다고 사진을 찍고 즐거워한다.
나도 예전에는 작가 누가 다녔었다는 카페,
소설 속 모델이 되었다는 장소를 참 열심히도 찾아다녔었다.
어쩌면 여행의 상당 부분은 자기 안의 환상을 찾아다니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또는 나도 남들처럼 어디 어디에 가봤다는 만족감.
유명한 장소를 도장깨기 하면서 목표를 채워가는 듯한 기쁨-이런 심리적인 이유도 많겠고.
뭐면 어쩌겠는가.
즐거우면 된 거지.
여행 경험이 많아지면서 여행지나 방법에 관해 변화가 있다.
자기의 방식을 찾아내는 걸까?
앞으로는 여행 방식에도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여행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낯선 곳을 바라보는 폭이 넓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