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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Apr 03. 2020

죽 이야기

음식에 관한 단상 19

죽을 좋아한다.

죽은 우리 집 식탁에 자주 올랐다.

소화력이 떨어지는 체질이라 몸의 요구가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누룽지죽, 콩나물 죽, 닭죽, 소고기죽, 아욱죽, 시래기죽...

죽이라면 재료 불문 다 잘 먹는다.

단, 맛있어야 함.

시중에 죽집도 성업 중이고,

레트로트 식품으로도 많이 나와있다.

그런데 입맛이 우리 집 죽에 길들여져서인지

시중에서 파는 죽은 한번 먹으면 더는 못 먹겠더라.

그래서 낑낑,

한 그먹겠다고 수고스럽게 죽을 내내 저어야 한다.



예전에 내가 아프면 어머니는 입맛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온갖 죽을 번갈아 끓여 대령하셨다.

죽에 잘 어울리는 반찬까지 함께.

집에서도 먹고 도시락으로 학교에도 싸갔다.

어머니 죽은 손이 많이 간다.

불린 쌀을 불에 올려 끓기 시작하면 내내 저으셨다.

쌀알에 물이 완전히 흡수되어 통통해진 쌀알이 물기와 분리되지 않도록 오래오래 저으면서 끓인다.

그렇게 끓은 죽은 식어도 물기가 생기지 않고 식감이 차지다.

그 맛에 익숙하니 쌀알을 갈아 물기 흥건하게 후루룩 끓여 낸 죽은 우리 집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어머니 마지막에 죽을 드셨는데,

죽 끓이기가 힘들어 드실 때마다

이미 끓여 놓은 콩나물 죽, 팥죽, 소고기죽 같은 죽 두어 가지를 조금씩 덜어

전자레인지에 데워드렸다.

그 예민한 입맛에 그렇게 내놓는 죽이 맘에 드실리 없었을 텐데.

딸 힘들까 봐 아무 말씀 안 하신 걸 생각하니,

후회가 될 뿐이다.



런던에 갈 때 몸이 안 좋은 적이 있었다.

비행기 타고 가는 내내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아팠다.

따끈한 국물  훌훌 들이마시고 온돌방에서 한숨 자면 개운해질 것 같았지만,

뭐 현실은 좁은 비행기 안.

짐을 찾아 공항에서 헤매며 호텔에 들어갔을 때는 몸이 녹초가 되어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있다가 그냥 자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바깥은 너무나 화사한 6월.

서양식 수프도 아니고 일본식 라멘도 아닌

꼭 쌀로 끓인 따끈한 죽 한 사발 먹어야겠다, 싶었다.

시끌벅적한 차이나타운으로 가서,

죽집을 찾아내 생선죽을 주문했다.

물기 흥건하고 쌀알도 갈아냈더라만,

부드러운 쌀맛에 따듯하고 간이 잘 맞아서 맛있게 먹었다

지끈지끈 아픈 머리와 으슬으슬한 몸은

그렇게 죽 한 그릇으로 개운해져서.

나는 화창한 6월의 런던 속으로 활기차게 걸어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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