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의 마지막 며칠

by 기차는 달려가고

젊어서 여행 다닐 때는 유레일패스 같은 레일패스를 종종 이용했다.

시간은 많고 갈 곳도 많으니 기간 한정 마음껏 기차를 탈 수 있는 레일패스는 개이득.


그때는 지금만큼 여행지에 관한 정보가 많거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때가 아니어서,

종이 지도와 인쇄된 기차 운행 시간표를 들고 다니면서 여행 스케줄을 짰었다.

유럽의 경우 예약 없이 아무 때나 기차를 탈 수 있는 레일패스는,

자유롭게 여행하는 나에게 정말 편리한 제도였다.

더구나 나는 기차에 앉아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를 좋아했으니.

(운전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버스는 멀미를 한다.

배는 멀미로 초주검이 된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좁은 통로에서 짐에 부대낀 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있다.

- 기차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

레일패스는 기차를 많이 탈수록 이익을 보는 느낌이어서

여기저기 많이 다녀야지, 마음먹었다.



그때 참 많이도 다녔다.

유럽에서 꼬박 두 달,

비엔나에 있는 후배 네 집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밤 기차 타고 베니스를 오가기도 했고,

독일에서 스위스를 지나 이탈리아까지.

나라마다 다른 기차 청결도와 물가를 고려하면서 기차를 골라 탈 정도로

유럽 기차여행에 익숙해졌었다.


그러다 유효기간 3일 남았을 때 아, 지쳐버렸다.

체력 고갈.

많이 걸어 다리는 저리고,

가방을 둘러 맨 어깨는 아프다.

유럽 도시는 어디 가나 비슷해 보이지,

물가는 왜 그리 비싸!

그렇다고 패스 유효 기간을 포기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걷는 걸 줄이자.

기차만 줄곧 타야겠구나.



남은 사흘, 내내 기차를 탔다.

치즈, 빵, 과일, 육포, 물 같은 먹을거리를 한 주머니 사서는 계속 먹으면서 기차에 기대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앉아 있기에도 지치면 기차를 내려서 한두 시간 걸으며 주변을 구경하고 다시 기차에 탔다.


그렇게 내려서 잠깐씩 주변을 둘러본 장소 중에

암스테르담, 브뤼셀, 바젤, 쾰른 같은 도시들이 있다.

그때는 각 나라 별 다른 통화를 썼을 때라

물가가 비싼 스위스에서는 남은 동전으로 커피만 마시고.

암스테르담에서는 아예 돈을 바꾸지 않고 한두 시간 운하를 따라 걷기만 했었다.

음식이 맛있고 물가도 낮은 이탈리아에서는 밥도 마음껏 먹고 간식거리도 넉넉히 사들고 했었다.

(대신 이탈리아 기차는 별로.

독일, 스위스 기차가 좋았다.)



그렇게 기차를 타면서 유럽의 지형을 알게 되었다.

알프스는 달력에 나온 사진 그대로였다.

그 풍경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찼다.

까마득히 높은 산을 뚫어 길을 내고 다리로 이어 기차를 달리게 했던 100년 전의 기술이 놀라웠다.


서유럽 북쪽 지역은 평원이었다.

농지와 석축과 운하와 기찻길 같은 인간의 손길이 지구에 더해진 오래된 풍경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원래 그것이 자연인가 싶었다.

서유럽의 농촌 지역은 참 넓고 평온해 보였다.

젊었던 내게는 삶의 애환은 느껴지지 않고 윤택해 보이는 전원의 평온한 풍경만 눈에 들어왔다.


서유럽은 대단히 넓은 지역이다.

그 넓은 땅에 크고 작은 도시가 연이어 나타나고

농촌에는 곳곳에 마을이 흩어져 있어서.

북미 지역처럼 대자연의 광활함 같은 대륙적인 느낌을 지는 않았다.

지역은 넓고 지형은 다양하지만 인구 또한 많았다.

조밀하지 않은 정도.

또 너른 평원은 상당히 기름진 농토이기도 해서 선진 기술국으로 알려진 서유럽 나라들은 공업이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농업 비중도 보였다.



체력이 된다면 또 그렇게 기차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다.

도시와 농촌과 마을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싶다.


한동안 여행은 코로나 19에 달려있을 것 같다.

앞으로의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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