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할머니랑 손 잡고 걸은 이야기

끄적끄적

by 기차는 달려가고

지난달 이야기다.

병원 진료를 오후 늦은 시간에 예약해서,

도서관에 들렀다 가려고 반납할 책을 등에 지고 집을 나섰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뒤에서 누가 똑똑 두드리시네.

어느 할머니께서,

내가 지금 똑바로 서있을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좀 잡아도 되겠냐고.

그래서 얼른 손을 잡아드렸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면서 이젠 됐으니 혼자 가시겠다는데.

그럴 수가 없지.

횡단보도를 같이 건너자 말하고 손을 잡고 천천히 길을 건넜다.

어디 가시냐, 물었더니.

지하철 두어 정거장 거리에 사시는 분인데,

동네 은행이 없어져서 이쪽 은행에 일 보러 나오신 참이란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횡단보도에 서있는데,

갑자기 몸을 똑바로 가누기가 힘들어지신 거였다.

큰 병은 아니라시고,

아마 신경 계통에 약간 문제가 있는지.


길을 건너온 후에도 혼자 보낼 수가 없어,

내가 가는 방향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지하철역까지 모셔드리겠다 하니.

괜찮다, 미안하다, 를 연발하시면서도 손을 놓지 않던 할머니는,

굉장히 고마워하시면서 줄줄 신상발언을 이어가셨다.


겉으로는 훨씬 젊어 보이셨는데 연세는 아흔이 다 되셨고.

- 나이 들면 쫀쫀한 피부가 최고.

주름이 덜 생긴다.-

딸만 대여섯 있다는 것 같았는데,

누구누구는 근처에 살고,

또 누구는 외국에 시집갔고,

해서,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 혼자 지내신다고.

아들을 낳았지만 어릴 때 잃었는데,

그놈이 살아있었다면 같이 살았겠지?


요새는 노인들이 다 혼자 사세요,

연세보다 훨씬 젊고 똑똑하신데요, 뭐.

지하철역 엘리베이터에 할머니를 태우고 손을 흔들었다.



그 나이면,

아마 우리 세대는 좀 달라지겠지만.

한반도의 격동기를 살아낸 지금 그 또래 노인들은,

정말 휙휙 바뀌어가는 세상에 적응하며 혼자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거다.

고생을 많이 한 세대라 몸도 성치 않고,

가족들이 북적거리는 데서 성장하고 살아온 분들이니 노년에 주어진 적막함을 견딜 심리적 준비도 안 된 상태일 거다.

재산은 있어도, 없어도,

때때로 돈을 둘러싼 문제가 마음을 괴롭힐 테고.


그날 약간 쓸쓸한 여운이 남았는데.

그래도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용기가 있고.

뒤통수만 보고서도 시간 많은 나를 선택할 만큼 감식안도 있는 분이니,

혼자 씩씩하게 잘 살아가시겠지,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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