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집안일이 잠깐 멈추는 틈틈이 어머니는 피아노 앞에 앉으셨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서 호흡을 고르시다
아/ 아/ 아/ 아 / 아/
아, 에, 이, 오, 우 발성연습을 시작하신다.
잠겼던 목이 풀리면 악보를 골라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하신다.
즐겨 부르시던 가곡은 '아무도 모르라고'라든가 '동심초'라든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호프만의 뱃노래' 같은.
그러다 음량을 키우고 감정을 팍팍 실어서는 오페라 아리아로.
어머니는 점점 깊숙이 노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신다.
피아노가 놓여있던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파묻혀 셜록홈스의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읽고 있던 나는,
런던의 안개 자욱한 베이커가에서 빠져나와
엄마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부엌으로 가서 엄마가 우리 간식으로 튀겨 놓으신 감자 부각을 볼이 메이게 집어먹고는.
다시 엄마 곁에 앉아 악보를 넘겨주기도 하면서.
제법 호의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 노래는 끝나지 않고 오히려 노래는 힘을 더해간다.
노래하는 어머니는 쌓인 집안일을 잊고.
슬슬 간식이 당기는 아이들도 잊고.
걱정거리도, 마음 상한 일도, 해내야 할 과제도 치워버리고.
곁에서 알짱거리는 딸에게서마저 떠나 혼자 저편 세상으로 가버리신다.
노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어머니는 내려올 줄 모른다.
와락, 아득한 먼 곳으로 날아가는 어머니를 붙들어야 할 듯.
나는 피아노 치는 어머니를 흔들고 팔을 잡아당긴다.
아무렇게나 건반을 두드려대도, 꽥꽥 엉터리 노래를 질러대도.
어머니는 꿈쩍도 않는다.
배고파 엄마가 밥 줘.
난 이 노래 싫어.
나도 피아노 칠래, 엄만 그만해.
나는 딸의 권리로 노래 부르는 어머니를 맘껏 훼방한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나무꾼의 선녀처럼.
어머니의 노래는 어머니를 천상으로 끌어올리는 날개옷이었다.
아버지는 늘 "요리랑 노래는 너희 어머니가 최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액면 그대로와 행간의 의미, 두 가지를 모두 읽어야 한다. 흠)
노래야 잘하시니 전공까지 하셨겠지만.
결혼 전에는 음식을 해보지도, 딱히 배우지도 않으셨다는데,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최고라고 먹어본 모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학교 다닐 때 우리 집 아이들은 소풍날 선생님 도시락 담당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 빈 그릇을 찾으러 가면 가정 선생님은 내가 가져간 찬합을 높이 쳐들고 있다가
"어머 이거 네 거니? 엄마가 다 만드신 거야? 음식 솜씨 참 좋으시다."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외할머니 음식이 입에 익어서 그런지 닥치니까 다 하게 되더라."는 쿨한 반응.
어렸을 때 내가 음악 콩쿠르에 나갈 때면 백화점을 둘러보고 오신 어머니는
"눈에 차는 옷이 없어." 하시고는
동대문 시장에서 반짝거리는 옷감을 사 오신다.
저녁 밥상을 물린 늦은 시간.
내가 쿨쿨 잠이 들 때 특별한 재단이랄 것도 없이 옷감을 이리저리 잘라서는 어머니는 재봉틀 앞에 앉으셨다.
중간에 잠에 떨어진 나를 깨워 얼기설기 기운 천 쪼가리들을 대충 대어보셨을 뿐인데.
아침에 일어나면 잠자리 날개 같은 하늘거리는 무대복이 짠,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여학교 재봉 시간에 배운 게 다라는데,
바느질도, 뜨개질도, 매듭을 묶거나, 접시에 음식을 담아도, 빨래를 가래도.
어머니 손길에 가면 맵시가 달라진다.
왜!!!
왜!!!!
왜!!!!!!
나는 그렇게 못 할까?
성악도였던 어머니는 유학을 준비하여 미국 대학의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을 약속받았다.
그날부터 외할머니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모할머니는 어머니를 붙들고 눈물과 한숨으로 긴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아버지 잃고 여기까지 밀려왔는데 겨우 우리 세 식구, 이젠 태평양 건너 헤어져야 한단 말이니?"
유학 수속할 때는 비용을 빌려주며 격려하던 아버지도 말이 좀 달라졌다.
"혼자 가면 힘들걸. 나랑 결혼해서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결혼하고 첫째를 낳은 뒤 아버지는 훔볼트 장학금을 받아 혼자 독일로 유학을 떠나셨다.
뒷날 아버지는 독일에서 연구를 계속할 기회를 얻게 되어 한국에 있는 아내와 첫째를 불러들이려 하셨는데,
이제는 그만 귀국하여 가족을 돌보라는 할머니의 편지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머니의 기대도 꺾여버렸다.
양가의 첫 아이로, 3대 독자의 외동딸로 열세 살에 남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집안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흠뻑 받으며 자라난 어머니는.
각종 예능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가족과 선생님들이 큰 기대를 보이셨단다.
그 시절 여자아이에게 바랄 수 있는,
그러니까 부잣집에 시집 가 남편에게 사랑받으며 자식 잘 키우는 '복 많은 여자'의 인생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활짝 꽃 피우는 독자적인 자신의 삶을 꿈꾸며 소녀 시절을 보냈다.
전통적인 여자의 삶에 더해 자기라는 한 인간의 삶까지 기대하셨다는 뜻이겠지.
(음, 양손의 떡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기대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셨나 보다. 이건 우리 세대도 마찬가지.)
어머니는 대하는 모든 것에 순정의 마음을 다하고 온 힘을 쏟으신다.
대강 대강, 설렁설렁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것만이 남아 있는 양, 지금 대하는 그것에 모든 열과 성을 쏟아붓는다.
정성으로 음식을 만들고, 꼼꼼하게 집안을 치우고, 공 들여 바느질을 하시고, 열성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신다.
앞뒤를 재거나, 이해타산을 따지거나, 스스로를 가장하거나, 다른 마음을 뒤로 감추지 못한다.
그냥 아무 요량 없이 그 순간, 그 대상에 자신을 몽땅 던져서 모든 것을 쏟아내고는
텅 비어서는 쓰러질 듯 자리에 몸져누우신다.
외삼촌은 "너희 어머니는 에너지 분배가 안 된다"며 흐흐 웃으셨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아버지는 어머니의 성향을 속속들이 파악하셨겠지만, 남편인 당신이 어머니에게 맞출 의향은 없으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때로 엉뚱한, 대책 없는, 맹목의 기질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는,
"엄마는 예술가라 저래."
체념인 양, 이해하는 양 한 마디를 던졌다.
이렇게 뭉뚱그리는 '예술가 기질'에 어머니는 은근히 자부심을 지녔던 게 아닐까.
따지지 않고, 재지 않고, 순정의 마음을 따라 살겠다는 당신의 굳은 의지.
욕심부리지 못하고, 셈이 빠른 세상 물정에 어두우며, 저 사람의 감춰진 속마음을 가늠하거나, 처신이 약삭빠르지 못한 어머니는,
자신을 방어하는 싸움도 할 줄 모르신다.
악의에 부딪치면 고스란히 다치고 만다.
세상이 다 내 맘 같으려니- 무방비로 세상을 대하는 어머니는 깊이 상처받는다.
어머니 나이 칠십에 경제적 파산과 인간적인 배신이라는 어려움을 겪으셨다.
어찌해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는 격류에 휩쓸렸음을 알게 된 즈음 어머니와 나는 제주도에 갔다.
무작정 언덕을 넘어, 바다를 향해, 구비구비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간 조용한 바닷가 작은 마을.
낮은 지붕들과 누렇게 변해가는 풀과 하얀 방파제와 그리고 파란 바다에는 같은 빛깔의 하늘로부터 눈부신 햇빛이 그대로 내리 꽂히는데.
화사한 빛 아래, 마을은 정물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방파제 끄트머리에 서서 어머니는 한참을 바람을 맞으며 짙푸른 망망대해를 바라보시다가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아름다운 시어들이 어머니의 마음을 담아 고운 음성에 실려 선율을 타고 노래가 되었다.
차 안에서 파란 바다로, 그 바다와 맞닿은 하늘로 어머니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왈칵.
저렇게 사셔야 하는데.
저렇게만 사셔야 하는데.
노래하고 음식 하면서
다른 것은 상관없이 그렇게,
그렇게만 살았어야 하는데.
순정이 사라져 버린 각박한 세상은 어머니에게 가혹했다.
젊을 적 어머니는 당신이 거두어야 했던 많은 식구들과 큰 살림에 부대끼고 치이며 사셨다.
엄마니까, 아내니까.
사람은 뒤로 가려지고 책임만 요구받았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그때 그러지 말걸 혹은 그때 안 그랬으가 했었는데- 하는 식으로 지나간 시간이나 선택을 후회하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태도가 싫어서
나는 절대로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몸과 마음이 시달리면서 공들여 차려내야 했던 밥상이 어머니가 발디딘 현실이었다면.
노래는 어머니가 온전히 가질 수 없었던 꿈이었으리라.
현실에 지치면 꿈이 어머니를 붙들어주고,
꿈은 다시 충실한 현실에 의해 꿈으로 지켜질 수 있었겠지.
그래서 어머니는 세파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천진함을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어도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던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시간을 지나,
당신을 지켜주었던 남편도 없는 노년에,
사람과 세상에 상처받고 재산을 잃은
어머니는 인생의 또 다른 면을 알게 되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자식들을 키우면서 이렇게 하면 아이들에게 좋겠지, 하는 것만 생각했던 것 같다고.
이렇게 해서 나쁠 수도 있는 부작용은 고려하지 못했다고.
무조건 잘해주려고만 했었는데...
당신의 뜻과 다른 부정적인 결과가 있다면 이는 자식들이 온전히 짊어지고 해결해야 할 자식들의 몫이다.
어머니는 당신의 최선을 다하셨으니.
고맙습니다.
천국에서 행복하시길 기도드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