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차리셨던 밥상
남향으로 벽을 채운 커다란 창이 나 있었다.
그리고 대문 옆 낮은 마당에서부터 올라온 키 큰 목련이 창문 가까이 서 있었다.
추위가 물러날 때쯤 커다랗게 피어난 달덩이 같은 하얀 목련 꽃은 어느 날 빛바랜 꽃잎을 한 장 한 장 떨구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거무죽죽한 줄기에는 아기 손가락 같은 연푸른 작은 잎새들이 퐁퐁 터졌다.
날이 더워져 가면서 이파리들은 날로 도톰해지고 커지고 짙푸러진다.
곧 목련은 무성한 나무가 되어 대문 안을 가득 채우고 마당에 넓은 그늘을 드리운다.
장마철, 굵은 비가 내리는 밤이면 잠결에 열린 창을 통해 목련의 커다란 이파리에 후투, 후드득 툭툭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가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느라 밤을 새우면,
골짜기 물안개를 뚫고 뒷산 작은 절에서 탁, 탁, 새벽 예불드리는 목탁소리가 아련하게 귀에 와닿았다.
그러면 나는 책에서 고개를 들어 눈을 감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천천히 번져 오르는 평화로움을 벅차게 음미했었다.
이른 아침, 창을 열어 고개를 내민다.
잠시 비가 그친 하늘이 뿌옇게 밝아 오면 도심을 지나 저 쪽 남산은 혼자 보랏빛 구름인 양 동실 떠 있고.
바로 눈앞 푸른 잎들에는 물방울이 총총 맺혀 있다.
시선을 창 아래로 내리면 푸른 뜰에는 짙푸른 이파리들.
그 사이 선명한 주황색 원추리꽃.
담장에는 아직 남은 장미꽃.
짙은 녹음의 냄새.
홈통을 타고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
그렇게 행복했었다.
* 여름 밥상
날이 더워지면 밥상에는 긴 겨울을 책임졌던 배추김치나 총각김치 대신 오이소박이와 열무김치가 올라왔다.
해가 쨍쨍한 점심 상에는 얼음을 둥둥 띄운 찝찔한 오이지와 콩국, 미역 냉국 같은 차가운 음식이 입에 잘 맞았다.
갓 지은 밥을 찬 보리차에 말아 반쯤 말린 생선을 구워 찬으로 먹는데,
아버지가 즐겨 드셨던 서대도 좋았지만 어쩌다 상에 놓이는 기름기 잘잘 흐르는 짭짤한 굴비 맛은 일품이었지.
우리들은 밥 한 술에 쭉쭉 찢은 도톰한 굴비 한 점을 얹어 입을 크게 벌려 먹었다.
그리고 김무침 한 젓가락, 캬.
저녁 상에는 더위로 늘어진 입맛을 다시라고 채소와 함께 매콤한 양념에 버무린 오징어,
미나리와 계란 지단, 쇠고기 다짐을 얹은 청포묵.
가끔 삼키기도 아까운 전복 숙회!
어쩌다 밥상에 오르던 모양새가 묘한 해삼, 멍게는 어른 음식으로 남기고,
나는 함께 접시에 담긴 삶은 오징어를 얇게 저민 오이와 미역에 싸서 초고추장에 콕 찍어 먹었다.
계속 들이켠 찬 음식으로 속이 냉할 때쯤에는 콩나물 죽이나
박박 씻은 아욱에 된장을 풀어 끓인 죽,
또는 녹두죽에 간간한 생선조림이나 고기전으로 속을 보듬는다.
이열치열이라, 덥다고 찬 것만 찾아 냉해진 몸은 뜨거운 육개장이나 생선 매운탕으로 땀을 쭉 내면 몸이 개운해졌다.
여름 밥상에 자주 오르던 감자와 매운 고추를 곁들여 지져낸 찝찔한 고등어자반은,
입에서 오돌오돌 씹히는 팔팔 끓인 누룽지랑 함께 먹어야 제맛이지.
아, 그런데 삼겹살을 고추장 양념으로 버무려 구운 돼지불고기는 왜 더운 여름날 저녁에 더 맛있을까?
장마가 시작될 무렵 어머니는 집 안팎을 대청소하신다.
창에 먼지가 껴있으면 비가 내리치면서 얼룩이 지니 미리 깨끗이 닦아 두어야 한다.
빗물이 잘 내려가라고 홈통 배수구에 낀 이파리들을 치우고,
세차게 쏟아지는 소나기에 빗물이 고이지 않도록 마당의 땅을 고른다.
할 수 있는 빨래는 미리 해 두고,
이불 홑청은 몸에 붙지 않는 사각사각한 천으로 바꾼다.
수건과 걸레는 햇빛에 뽀송뽀송 말려 서랍을 가득 채운다.
큰 장을 보러 간다.
한동안 먹을 수 있도록 냉장고와 벽장에 먹을 것들을 층층이 쌓는다.
지루한 장마철 비 내리는 날이면 나는 산골짜기가 가득 담기는 북쪽 창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창틀 안으로 절묘하게 인공구조물은 빠지고 시퍼런 이파리들이 울창하게 겹치는 풍성한 여름 산의 능선만 담겼다.
후투두둑,
하늘은 꺼멓고,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뒷마당 장작더미에는 조그만 청개구리가 폴짝 뛰어다닌다.
그렇게 한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면 구름이 물러가고,
하늘이 밝아지고,
푸르스름한 골짜기에는 뽀얗게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파랗게 갠 하늘에는 하얀 새들이 줄을 지어 날아간다.
스무 살의 내가 바라보던 산과 나이가 들어 바라보는 풍경은 같지만, 느끼는 깊이는 다르다.
오랫동안 한 집에서 스무 살의 나.
서른 살의 나.
마흔 살의 나를 지나올 수 있었던 나는.
그 긴 시간 함께 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풍경의 기억을 가질 수 있어 참 감사하다.
집에 앉아 종일 비 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만 해도 좋은 날에는 바삭바삭 튀김을 튀기거나 반죽 질척하게 부침개를 지져먹는다.
예전에 식구가 많을 때 비 내리는 날이면 한 팔에 안기지 않는 커다란 채반이 넘치도록 닭고기, 오징어, 햄, 호박, 감자, 고구마, 당근, 양파, 미나리에 고추까지 튀김이나 부침개를 만들어 모두들 둘러앉아 혹은 오며 가며 날름날름 집어 먹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 새우를 튀기는 날은 까르르 입을 못 다물었지.)
재료가 익기 무섭게 아이 뜨거워! 손가락을 호호 불며 입 안으로 삼켰다.
감자 한 자루를 어머니, 할머니, 친척 여자들, 식모 언니가 둘러앉아 얇게 썬다.
산더미처럼 쌓인 감자 조각들은 팔팔 끓는 물에 넣어 살짝 데쳐 낸다.
데쳐낸 감자는 옥상에 올려 평상에, 발에 널어 말린다.
그렇게 말려둔 얇은 감자는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 튀겨서 굵은소금을 뿌린다.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는 옷도 갈아입기 전에 감자튀김부터 찾아 먹었다.
겨울에 말랐다 녹았다 하여 물기가 빠진 가자미는 조각을 내어 가루 묻혀 기름에 튀기고.
말랑말랑한 노가리 구운 것은 밤참으로, 군것질로 참 많이도 먹었지.
그 모두가 지금 내 키의 재료들.
* 밥상의 힘
비가 내린다.
몇 날 며칠 비가 내려 사방이 젖었는데 또 세찬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날.
하필이면 종일 바깥을 돌아다녀야 해서 우산 속으로 들이치는 비에 옷은 축축하고,
빗물 고인 땅을 디뎌야 하는 신발은 이미 젖었다.
축축한 몸과 잿빛 시야로 기분은 축 쳐져서
사는 게 고생스럽다는 암울함을 떨칠 수가 없다.
지치고 고단해 무거운 발을 끌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일찍 어두워진 골목에 환하게 불 켜진 내 집은 얼마나 반가운지.
젖은 옷을 허물처럼 벗고 쓰러질 듯 밥상에 않는다. 밥상에는 기름기 동동 뜨는 굵은 파가 많이 들어간 매운 닭개장이,
혹은 시래기를 많이 넣고 된장을 풀어 푹 끓인 구수한 갈비탕이 따끈하게 차려져 있다.
국에 밥을 쓱쓱 말아 입을 크게 벌려 한 입 먹는다.
그저 먹는 일에만 몰두한다.
배가 부르고 그릇이 빈다.
슬며시 입가에 번지는 미소.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몸은 덥혀졌다.
찬 보리차 한 컵 쭉 들이켠다.
창을 열어 구름에 가린 밤하늘을 바라본다.
종일 암담했던 기분은 물러가고,
다시 힘을 얻은 몸은 빗소리를 음악처럼,
눅눅함을 견디며 비 내리는 계절을 견딜 수 있다.
여기는 나의 집이니.
몸에 내리던 비는 집 바깥의 사정이 되어,
지금 나는 안전하고 평화하게 내 집의 맛있는 밥상에 앉아 든든하게 속을 채울 수 있었으니.
그렇게 또 하루를 견디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