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차리셨던 밥상
내가 열 살 때 기름보일러 집을 지어 이사하기 전까지 우리는 연탄 때는 작은 단층집에 살았다.
내가 태어날 즈음에 광화문 네거리에서 내과 의원을 하셨던 아버지는 5.16으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군의관으로 차출되셨고.
(아버지 20대에는 – 학생 운동을 하셔서 정학을 받느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고향에 계셨다. 군대 면제 대상이었는데, 한참 뒤 권력이 바뀌면서 30대가 되어 이미 유학도 다녀오고 결혼하여 자녀가 둘이나 있는 우리 아버지를 군에 차출했다. 알고 보니 그 나이 대 의사들 중에는 비슷한 경우가 적지 않더라.)
당시 경복궁 건너편 국군 통합병원(지금은 현대미술관 별관이 되었다.)에서 근무하게 되셨다.
종로 한복판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사대문 밖, 새로 만들어진 주택단지로 서둘러 이사하였고,
이웃들과 친분이 생긴 아버지는 군에서 제대한 뒤에 그 동네에 그냥 눌러살게 되었다.
산과 개천 사이 길쭉한 평지에,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를 앞에 두고 골목과 집들이 반듯반듯 나뉜 조용한 동네.
네모 반듯한 대지에 방 세 개, 마루, 부엌, 화장실 구조로, 기와를 얹은 네모난 형태를 가진 작은 집들은,
비슷한 모양에 넓이도 고만고만하고, 집주인의 나이나 가족 형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나중에 뒷마당에 방과 목욕탕과 창고를 더 들여서 뒷마당은 거의 통로만 남게 되었는데, (그 좁은 틈에 장독대까지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좁은 앞마당에는 나팔꽃, 갖가지 색깔의 채송화, 분꽃에, 개나리, 무궁화, 라일락, 겨울이면 빨간 열매를 맺는 사철나무도 빽빽이 자라고 있었다.
여름이면 송충이가 어물어물 기어가는 앵두나무에서, 우리 집에 놀러 온 막내 삼촌은 빨갛게 익은 앵두를 조심조심 우리 손바닥에 가득 담아 주셨지.
땅을 파지 않고 벽돌을 쌓아 올린 집이어서 모든 창문이 활짝 활짝 열리는 여름에 나는,
햇살이 반짝거리는 앞뜰을 바라보는 마룻바닥에 납작 엎드려서는.
두발을 까딱거리며 흙 땅 몇 뼘 건너 바람에 살랑거리는 진한 초록 이파리들과 색색의 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쨍하니 밝은 햇살과 아롱이다롱이 피어있는 정다운 뜰이,
아, 참, 좋구나!
그렇게 마음이 뿌듯했었다.
찌는 무더위에 지치고 여름 내 쓰레기통의 수박 껍데기를 세차게 윙윙 돌던 쉬파리들도 기세가 꺾일 때쯤 태풍이 남은 여름을 마저 몰아가면.
아, 단풍이 고운 천고마비인가, 싶다가
금세 낙엽이 떨어지고 북풍이 불어닥치면서 추위가 다가온다.
어른들은 겨울 채비에 들어간다.
연탄이 배달되어 창고를 채우다가 담벼락에까지 쌓이고.
우리들이 신나게 손가락에 침을 묻혀 뽕뽕 구멍을 낸 문창호지들은 마른 꽃잎을 넣은 창호지로 새단장을 하지.
털실 뭉치는 어머니의 바쁜 손놀림 속에서 우리들의 예쁜 스웨터로, 복슬복슬한 모자로 완성되고.
지난해보다 키가 훌쩍 큰 우리는 부모님 따라 간 명동의 백화점에서 겨울 외투 하나씩을 얻어 입었다.
솜틀집에 다녀와 폭신해진 이불들은 통, 통, 통, 통. 다듬이질로 빳빳해진 홑청을 두르고.
눈을 가느스름 뜨고 높이 쳐든 바늘에 길고 긴 무명실을 꿰던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 김장
그러다 눈발이라도 날리려나 싶은 하늘이 낮게 내려앉은 어느 날,
마당에는 배추가, 무가, 젓갈이, 동태가, 양념들이... 산처럼 부려진다.
커다란 항아리들은 박박 씻기고.
온갖 양푼들과 조리도구들이 총출동하며.
집안은 들썩거리고,
바쁘다시면서도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번진 어른들은 왔다 갔다 부산스럽다.
겨울 채비의 정점-김장 날이 온 것이다.
그때 겨울은 왜 그리 추웠던지.
아랫목은 발을 디딜 수 없게 절절 끓어도 윗목은 시리기만 하는데,
얇은 벽으로는 바깥의 냉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나무틀에 얇은 유리를 댄 창은 늘 삐걱거려서
바람이 한 번 불면 덜컹덜컹, 어머니가 만들어 단 헝겊 커튼이 사정없이 펄럭거렸다.
다른 방에서 자던 나랑 동생은 겨울이 되면 윗목에 연탄난로를 들여놓은 안방에서 부모님이랑 같이 잤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마치시면 안방 난로에 새 연탄을 갈아 넣고 방에 걸레질을 다시 하고는 두툼한 겨울 이불을 깐다.
옷을 벗고 내복 차림이 된 우리는 이불 속에 들어가자 금세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일을 마치신 아버지가 동료들과 한 잔 하고 밤 늦게 들어오셔서는 주머니에서 부스럭 부스럭 군밤이니 전병이니 군것질거리를 꺼내시네?
아버지 오신 기척에 벌써 깨어있던 우리는 볼이 메이게 군밤을 욱여넣고는.
아버지 팔에 매달려 '서울 구경'을 시켜 달라커니, 방고를 태워 달라커니 주문이 많았다.
(요새 사람들은 '서울 구경'이니 '방고'가 뭔 지 아시나?)
몸으로 놀아주다 지친 아버지가 자리에 누우시면,
우리는 갑자기 효녀가 되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 다리를 주무른다, 어깨를 두드린다, 수선을 떨었다.
이젠 정말 자야 한다고 불을 끈 캄캄한 방에서 한 이불을 덮은 나랑 동생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킬킬거리다가도,
서로 눈을 찢으며 이불을 잡아당기고 발을 차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침 산에서 내려온 세찬 바람이 윙~ 낮은 지붕들을 훑고 지나가기라도 하면 아버지는
'어흥~인왕산 호랑이가 잠 안 자고 떠드는 애들 잡으러 온다!',
입과 눈을 양손으로 잡아당겨 무서운 호랑이 얼굴을 하시고.
동생과 나는 무섭다고 꽥꽥 소리를 지르며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
* 김치밥
긴 겨울밤.
어둠 속에서 출출하다며 잠이 든 우리를 깨우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 눈짓에 따라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동동거리다 곤히 잠든 어머니를 흔들고.
잠이 덜 깬 어머니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입맛을 다시는 우리에게 떠밀려 추운 부엌으로 나가신다.
곧 쟁반 가득 재료를 갖고 들어오시는 어머니.
연탄난로에 냄비를 올리고 송송 썬 김장 김치랑 씻은 쌀에 물을 붓고 김치 국물까지 한 국자 더 해서는 난로의 불구멍을 한껏 열어 화력을 돋운다.
활활 타는 난로 위에서 냄비는 포르르 끓다가 곧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데,
코를 들썩이며 난로 위의 냄비만 쳐다보시던 아버지는 자꾸 냄비 뚜껑을 열어보다가 어머니에게 한 소리 듣곤 하셨다.
냄비의 물이 잦아들면 양념한 소고기를 얹어 뜸을 들이는 참기 어려운 그 시간.
이불을 밀어내고 놓은 작은 밥상에 둘러앉아 숟가락을 들고는,
아직도 멀었어? 언제 먹을 수 있어?
조바심치며 침을 삼키던 우리는
드, 디, 어!
펄펄 김이 오르는 뜨거운 김치밥을 한 그릇 받아 양념장을 비벼 한 숟가락 크게 입에 넣었다.
막차에서 내린 피곤한 가장들이 얇은 코트에 어깨를 웅크리며 서둘러 집을 찾아가고.
장사를 끝낸 군고구마 수레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찹쌀~떡, 메밀~묵' 장수의 처량한 외침이 골목을 떠돌면.
아마 통금을 기다리는 야경들이 딱따기를 매만지면서 하품이라도 할 즈음.
작은 집,
안방에 놓인 연탄난로에서 만들어지던 겨울밤의 요술은 우리의 마음과 몸을 얼마나 따습게 만들어 주었던지.
어린 시절 추운 겨울밤의 기억은 내 안에 단단한 마음을 이루어,
인생의 고비에서 나를 붙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