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마지막으로 전등이 꺼졌던 안방에 다시 불이 켜진다.
잠에 빠져있었을 어머니가 비틀비틀 눈을 비비며 방을 나오신다.
어머니 뒤를 따르는 아버지는 왠지 죄송한 듯, 그러나 입가에는 새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신다.
오늘 밤도,
그놈의 출출함은 아버지를 잠 못 이루게 하였고.
그래서 어머니는 깊은 잠에서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어머니 주장에 따르면 아버지는
'내일 아침 안 먹고 나갈 테니 대신 지금 밤참 해달라'며 어머니를 깨우시는데,
자는 척하면 심지어 꼬집었다고:;)
잠이 덜 깨어 부엌에 들어가신 어머니가 뚝딱뚝딱 밤참을 만드시는 동안.
식탁에 앉은 아버지는 술병을 꺼내 술 한 잔 따르시고.
각자 자기 방에 누워서 라디오로 음악을 듣거나,
코앞에 시험을 두고는 공부 대신 서랍 정리에 분주하거나.
아니면 짭짭 냄새를 풍기며 1일 1 오징어 구이를 실천 중이거나,
하는 중이던 2층의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 싶은 배고픈 귀신들은,.
아래층에서 번져 올라오는 맛있는 냄새에 반색하며,
오호라 때가 왔도다!
신나서 통통 계단을 뛰어내려와 자리를 차지한다.
오밤중에 오늘의 네 번째 밥상이 차려지는 것이다!
아버지는 밤참으로 따끈한 국물이 있는 국수 종류를 자주 찾으셨는데,
그래서 어머니는 늘 육수와 고명 거리를 준비해두셨다.
겨울에는 사골 국물과 직접 빚은 만두가 상비되어 있으니 만둣국을 해 먹고.
갖가지 속재료를 넣어 만든 만두는 쪄서도 먹고, 지져도 먹고.
사골국물에는 칼국수를 끓여 먹기도 하고.
떡을 넣고 계란을 풀어 떡국으로도 먹고.
콩나물 밥이나 김치밥, 볶음밥도 종종.
갓 지져낸 뜨거운 전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입맛에 맞춰 동태전, 새우전. 감자전, 부추전 같은 부침개도 잘해 먹었다.
또 떡볶이-그때 우리 집에서는 빨간 고추장 떡볶이가 아니라
소고기와 채소, 또는 당면을 불고기 양념에 국물 자작하게 볶아 가래떡을 넣어 끓인,
요새 '궁중 떡볶이'라 하는 간장 떡볶이-를 즐겨 먹었는데,
그렇게 밤에는 반찬을 늘어놓지 않는 한 그릇 음식을 주로 먹었다.
그중에서도 쉽게 먹었던 따듯한 국수.
(어디까지나 먹는 입장에서 쉬웠다는 거지,
음식 하는 입장에선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살림을 하게 된 뒤에야 알게 되었다.)
멸치와 마른 조개 류, 다시마, 양파, 대파, 무 같은 재료를 끓여 맑은 육수를 내어 두었다가,
가는 밀국수를 삶아 건져내 토렴 해서는 동글게 말아 두고.
채 썬 호박, 당근, 오이, 버섯 같은 채소는 기름에 볶아서,
계란 지단에, 김은 살짝 구워 잘게 부수고.
간장 양념으로 졸인 다진 소고기를 고명으로 얹어 육수를 부어내는데.
지금은 이 음식을 대개들 잔치국수라 부르지만,
우리 집에서는 온면 녹말 국수를 명절이나 잔치에 먹었기 때문에
그냥 밀국수라고 부르는 일상적인 음식이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국수 한 입, 술 한 모금 드시면서
그릇에 코를 박고 국수를 빨아들이는 자식들에게 말을 붙이신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직업이라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아버지는
평소에는 스스로에게도, 가족에게도 결코 편한 분이 아니셨는데.
하루의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가족과 함께하는 밤참이 아버지께는,
신경을 느슨하게 풀고 당신 본연의 유쾌함으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1980년을 전후한 바깥세상은 여전히 겁박의 시대였지만,
우리 집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확실했다.
부모 품 안에서 10대, 20대에 들어선 뭘 모르는 자식들은 입만 살아서,
곧 어른이 되면 원하는 대로 폼나게 살아갈 듯이 잔뜩 시건방졌는데.
그래서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그 아무 말들을
부모님은 가로막지 않으시고 귀담아 들어주셨다.
그러다 '남들이~' 하면 '남들이 아닌 네 생각을 말해봐' 하셨고.
'남들은~' 하면 '넌 그저 남들 줄줄 따라서 살아갈 건 아니지?' 되물으셨다.
말하기 전에 생각하라고, 스스로 생각하라고 당부하셨다.
밤참을 나누며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시대에 관해서 종종 이야기해주셨다.
1928년 생인 아버지는 서울의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가세가 기운 집을 떠나 경성 팔판동 큰 기와집인 지인 댁에 머물게 되었다.
영민하고 자존심 강한 10대 소년이 단신으로,
일제강점기 말기의 암담한 시국을 한 줌밖에 안 되는 경성의 엘리트 집단 속에서 성장하면서.
입신양명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싶다는 식민지 소년의 분노 어린 정의감과,
'남자라면 먼저 생계를 도모하라'는 할아버지의 주문 사이에서.
조용한 소년의 내면에 휘몰아치던 질풍노도의 혼란과 갈등을,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의대생 시절에는 연극반 활동을 하셨단다.
와, 아버지는 잘 생겼으니까 주인공이었겠다.
햄릿? 로미오?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반짝이는 자식들 시선을 피하면서,
국수 국물 쭉 들이켜고, 음,
소주 한 잔 털어 넣으시고 허,
딴청을 부리시더니.
"난 너무 바빠서 무대에는 잠깐 올라갔었어."
즉, 단역이었다는 말씀.
흠, 잘 생긴 외모에 비해 연극적 재능이 무척 딸리긴 하시지.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는 식민지, 전쟁, 가난, 독재, 부패, 비굴함과 잔인함 같은 험난한 모든 것이 중첩된 고된 세월이었다.
당신이 지나온 시간을 회고하시면서,
그래도 우리 연배는 나은 거야.
5년, 10년 윗 세대는 징용, 학도병, 전쟁 때문에 목숨을 지키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설명해주셨다.
1980년 초,
나는 학교 학보사에 들어갔었다.
-여학생들은 뽑아도 금세 그만 두기 때문에 며칠이나 버틸까, 싶어 시험도 없이 그냥 받아줬단다, 피이.
아무 생각 없이 가방 들고 왔다 갔다만 할 뿐인 나에게까지 경찰의 시선이 닿았는지 어느 날 우리 학교 담당 정보과 형사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곱게 키운 딸, 무사히 학교 졸업하고 시집 잘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어유, 뭐 당장이라도 끌고 갈 것처럼 겁을 막 주더라고.
아버지는 무표정하게 남의 일인 듯, 그래야겠죠, 형사가 떠드는 말을 ㄱ댓꾸없이 듣기만 하시다가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했어.
아버지, 딸은 쳐다보지 않고 술 한 잔 쪼르르 따르시면서,
무심한 척, 나 쫌 잘했지?-칭찬 듣고 싶은 표정.
공적인 일로 왔다는 사람이 밥을 얻어먹어?
누구나 밥은 먹어야 하니까.
풉, 나까지 신경 쓰시고 우리나라 경찰 할 일 되게 없네, 툴툴거렸었는데.
학생들 동향에 늘 과잉했던 경찰의 일상 업무였을 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학보사 프락치가 자기 점수 좀 따 보려고 형사에게 뻥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저 여자애 맹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어마 무시하다고. ㅋ
울 아버지는 우리 딸이 의로운 일을 하려는 걸까? 잠깐 기대도 하고 염려도 하셨을까.
그러셨다면 곧 30초 만에, 맛있는 거 좋아하고 예쁜 옷 좋아하는 게으른 아이가 그럴 리는 절대 없다고 안도와 실망을 하셨겠지만 말이다.
우리 집 마당이 더 넓었으면, 싶었다.
옆에 작고 낡은 집이 붙어 있었다.
저 집 사서 밀어버리고 파란 잔디에 예쁜 꽃들 쫘르륵 심자고,
푸른 잔디에 하얀 집, 좋잖아?
입에 닭다리 물고 딸은 막 떠들어댔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아버지.
수저를 내려놓고 딸의 눈을 말끔히 바라보시며.
네 눈에는 허름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 집은 엄연히 그 집 사람들이 몸 담고 살아가는 소중한 보금자리야.
내 보기 좋자고 그걸 싹 밀어서 정원을 만들자고?
다른 사람들의 영역은 존중해야지.
순간 나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지면서,
타인의 영역, 존중- 그런 단어가 마음에 깊이 박혔다.
절제나 공존 같은 가치 없이 재주껏 많이 빼앗고 높이 쌓자는 가치관이 팽배했던 시절에,
우리 아버지는 딸에게 타인의 영역에 대한 존중과 공존이라는 확실한 가르침을 심어 주셨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히 우리는 사랑한다,
또는 당신은 무조건 날 사랑해야 한다고,
사실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부모의 또는 자식의 역할만을 강요하기가 쉽다.
가족은 나와의 관계 속에서만이 아니라
엄연히 독자적인 인격을 가진 개별자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노력을 통해 서로의 내면을 알아가고.
한 인간으로서 서로의 존재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밤참을 먹고 나면 곧 하품을 하고 몸을 뒤틀면서 식탁을 빠져나가려는 스무 살 상전 따님을 붙들며.
딸을 알고 싶어 하시고,
또한 당신이라는 한 인간과
당신이 고민과 생각으로 무겁게 한 발, 한 발 내디뎌온 삶을 이야기해 주셨던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그렇게 그렇게 부모를,
부모의 삶을 거름으로 자식의 삶을 열어가면서.
부모로, 자식으로 그 관계가 깊이깊이 이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