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차리셨던 밥상
촛불이 일렁인다.
향이 피어오른다.
병풍 앞에 놓인 상에는 음식이 그득 차려졌다.
외삼촌은 무릎 꿇어 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옥빛 한복을 입은 외할머니는 제상 옆에 앉아,
혼잣말 같기도, 한숨 같기도 한 서글픈 사설을 낮은 목소리로 웅얼웅얼 풀어내신다.
밥은 잘 드시고 옷은 뜨시게 입는지,
흉한 꼴 당해서 혼이 여전히 구천을 떠도는 건 아닌지.
날이 추워질 때 어디론가 끌려간 남편은,
그 지독한 전쟁을 겪었어도 절대 무뎌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혹시라도 아직 살아있다면 어디서든 다시 가족을 만들어 따순 밥상 받으며 편히 지내시라고,
외할머니는 정성 들여 차린 외할아버지 제사상 앞에서 간절히 기원하셨다.
통일이 될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문도 모른 채 뒤바뀐 운명으로 당장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정신없었던 나날.
모든 기대를 체념하고 당신의 뒤바뀐 처지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쯤.
남편이 마지막으로 집을 나선 날짜가 시작되는 한밤중에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셨다.
당신 처지에 대한 설움과,
행방을 알 수 없는 남편에 대한 걱정과,
늙은 양가 어머니를 고향에 남기고 떠나와야 했던 고통으로 가슴에 슬픔이 꽉 차 있던 외할머니.
간신히 견디고 있던 괴로움을
1년에 한 번.
제사상 앞에서 흐느끼며 풀어내셨다.
개인의 인생이 그렇듯,
어느 집안이나 흥망성쇠의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친가에서는 증조부께서 나라의 멸망에 발맞춰 가문의 쇠락을 가져온 불운한 역할을 맡으셨다.
재산은 다 날리고 어린 동생과 여러 분의 작은 마나님들만 남긴 채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10대였던 나의 조부는 일시에 아버지의 세계를 버렸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기독교를 받아들이셨다.
우리 아버지 외가는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번역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딸, 아들 차별 없이 신식 학교에 보냈다.
그래도 조상들이 돌아가신 날 저녁에 추도식이라는 이름으로 제사는 지냈다.
제상을 차리고 자손들은 절을 했는데 여기에 찬송가, 성경 봉독, 기도를 더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어머니가 아버지 제사의 책임을 맡으셨다.
폭염이 한풀 꺾일 때부터 상차릴 궁리를 하신다,
제삿날 며칠 전부터 집을 치우고, 그릇을 닦고, 김치를 담고.
여러 차례 장을 보고 이틀, 사흘 걸려 음식을 준비하는 큰 행사였다.
갈비찜이나 소고기 산적(꼬치에 꿰거나 고기를 넓적하게 굽는 산적이 아니라, 다진 고기를 양념해서 두툼하고 네모나게 크기를 달리해 모양을 잡아 팬에서 잘 익힌다.)
전복, 새우, 소고기 편에 배와 미나리, 빛깔 맞춘 채소에 잣 소스로 버무리는 해산물 냉채.
녹두전, 대구전, 육전 같은 전도 댓 가지.
아버지께서 잘 드셨던 굴비, 서대, 가자미 같은 생선 댓 가지를,
쪄서는 갖가지 고명으로 치장하고.
구워서는 양념장을 뿌려 켜켜이 쌓는다.
돼지고기는 커다란 덩어리째 삶아 자리를 잡고.
펄펄 통째로 찐 닭은 얌전히 다리를 모으고.
꿈틀거렸던 문어도 그대로 멈춰서 한 자리 차지한다.
볶고 무친 나물 댓 가지.
육포, 다식, 한과, 곶감, 밤, 대추, 잣, 은행에.
색색의 과일을 고이고.
마지막으로 메와 탕에 술을 올린다.
거기에 더해 우리들은 어머니의 대표 음식인 따듯한 녹말 국수로 음복을 마무리했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늘 살아온 대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 줄 알았다.
아이고, 아버지이,
세상 좋은 것만으로 상을 높이 고이리라,
불끈 효심으로 물질을 아끼지 않은, 어머니의 솜씨와 수고로 이루어진 제상 앞에서
우리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신연령이 해맑은 자식들은
차례차례 절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나른한 보고서를 올렸었다.
부모의 등에 업혀.
부모가 이룬 성과를 자기 것인 양 당연히 누리는 행운의 시절은 평생 가지 않는다.
언젠가는 부모 등에서 내려와 자신의 두 발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시점이 온다.
그때 진짜 자신의 인생이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태평하게 살아온 덕에 자기 자신도, 현실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되어.
마냥 낭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낙관하기 쉬운데.
고난이 닥쳐서는,
처음에는 그동안 쉽게 살아온 세금을 치른다며 제법 호기롭게 한번 해보자, 파이팅도 해봤지만.
연거푸 불운이 계속되면서 아, 사는 게 만만치 않구나.
비로소 고달픈 인생살이가 눈에 보이더라.
그 고단함에서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비로소 받아들인다.
이제 나는 아버지가 살았던 시간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아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버지는 내게 어른이시다.
더위가 수그러들고 아버지 제삿날이 다가오면,
벌써 아버지 생각에 울컥하면서.
그저 죄송한 마음이 된다.
어려운 시기가 길어지면서 마음은 위축되고 고인을 대할 면목이 없다.
상차림이 간소 해지는 건 괜찮다.
아버지는 허례허식을 싫어하셨던 분이라 오히려 조촐한 상을 반기실지도 모른다.
그래도 절로 나직한 한숨이 나오는구나.
그러면서 알게 된다.
아버지도 늘 있어서 자식들에게 그리 내주셨던 게 아니었네.
없어도, 비어도.
내 자식이기 때문에 마음도, 물질도 힘껏 내주셨던 거였구나.
당신을 파먹으면서 내가 자랐어...
냇킹 콜의 노래에 딸 나탈리 콜이 덧붙여 부른 노래가 있다.
부녀가 살아서 함께 부르는 노래가 아니고.
아버지 사후에 가수가 된 딸이 아버지의 노래에 자신의 목소리를 더한,
음향 기술로 가능해진 이중창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냇킹 콜 부녀의 노래, 'Unforgettable'을 떠올린다.
부모 살아 얼굴 마주해서는 자식은,
부모에 대해 자식이라는 자신의 '절대 권력'을 내려놓지 않는다.
당신은 무조건 일방적으로 날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한없이 위해야 한다는 억지.
자식은 부모의 무조건적인 보호와 지지를 받아내야 한다는 결코 자라지 않는 응석.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자식이 그만큼 세상을 산 뒤에.
부모를 나의 부모만이 아닌 한 인간으로.
그분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가,
어느 순간, 불시에, 그 한 조각이,
자식 심장에 날카롭게 날아와 박혀서야 비로소.
이 세상을 먼저 살아갔던 한 사람으로 부모와 그분들이 행했던 최선을 조금 이해하는 게 아닐까?
아버지는 어느 날 밤참을 드시다 우리에게,
방학에 집에 가서 자다 한밤중에 설핏 잠에서 깨면, 사랑채에서 할아버지 담뱃대 재 터는 소리가 탕, 탕 들려왔어.
밤이 깊도록 잠 못 이루시던 할아버지의 고뇌를,
당신이 그 나이가 되어 비로소 이해하게 된 할아버지의 번민을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이번 아버지 제사에도 딸은 아버지 제상을 준비할 것이다.
그릇을 닦고,
병풍을 털고,
아버지 즐겨 드셨던 음식 몇 가지로 간소한 제상을 마련하면서.
미안해, 그냥 미안해, 정말 미안해요, 하면서.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시네.
이번 제사에 우리 곁에 앉아 계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버지께 술을 따르고 절을 하면서
아버지 혹시라도 여기와 계시면 딸을 많이 안타까워하시겠지만.
그래도 딸은 용기 있게 잘 헤쳐나가고 있으니.
아버지는 편히, 마냥 편히.
이승에서의 번뇌일랑 다 떨쳐버리고.
지극히 평온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서는 딸이 못 차려드렸던 밥상.
맛있게 한 술 뜨시고,
술 한 잔에 얼큰해져서는.
하, 하, 핫!
웃으면서 돌아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