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대설

by 기차는 달려가고

처음 해외로 나간 런던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프랑스와 스위스, 이탈리아를 보름 정도 여행했다.

런던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도버해협을 넘어 대륙으로 갔는데,

단체여행이라 버스 운전기사와 전일정을 같이 하는 여행 가이드에, 각 지역에서는 그 지역 여행 가이드까지 함께 다녔다.


버스가 도버해협을 건널 때 탔던 페리는 자동차는 물론 기차까지 들어가는 큰 배였다.

그날따라 파도가 거칠어서 그 큰 배가 출렁출렁, 나는 뱃멀미를 심하게 앓았다.

'사랑의 유람선'이던가,

호화 유람선을 배경으로 하는 외국 드라마가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던 때였는데.

그날로 유람선 여행은 내 머릿속에서 싸악 지워졌다.



로마에서는 70년 만의 큰 폭설이 내렸다,

시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니 길에 서있는 높다란 나무들 위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로마의 소나무? 는 모양이 특이했다.

가지 없이 굵은 기둥만 높이 자라서 꼭대기에 줄기와 잎이 둥그렇게 무성하다.)

그 위에 무리 지어 있던 까마귀들이 휙 날아오르니,

나무에서는 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밝은 달빛은 구름에 가려서 뿌옇던 밤하늘과,

사방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였던 로마의 풍경이 떠오른다.

풍경은 멋있었는데 길바닥은 질척 질척.

가기로 했던 나폴리는 폭설로 엉망이 된 교통 사정 때문에 취소되었지.



2년 뒤에 다시 유럽을 여행하면서 나는 로마와 피렌체, 베니스와 피사, 밀라노를 여행했다.

로마는 상당히 넓은 도시다.

걸어 다니면서 유적들을 돌아보려면 체력이 급격히 소진된다.


포룸 로마눔 유적지에서 이년 전 로마에서 우리를 맡았던 여행 가이드를 마주쳤다.

생김새가 서양 동화책에 나오는 마녀와 꼭 닮아서

(그러니까 이마의 굵은 주름, 긴 매부리코와 홀쭉한 뺨, 풀어헤친 머리까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알아볼 정도였는데.

내가 인사를 했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마침 안내하고 있던 미국 관광객들에게,

이 여행자가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져서 다시 로마에 왔다, 고 말하는 게 아닌가.

눈치는 없이 정직하기만 한 나는,

지난 여행 때 트레비 분수에 동전은 던지지 않았는데요, 고백했고.

그 순간 쌩하고 표정이 바뀐 여행 가이드는 내게서 얼굴을 돌려 버렸다.



피렌체에서 묵었던 유스호스텔은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서 한참을 걸어가면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서 포도밭을 또 한참을 걸어가야 포도나무들 한가운데 성 같은 커다란 건물이 나왔다.

넓은 홀에 야전병원처럼 수십 개쯤의 침대를 주르르 늘어놓은 여자들 방에는,

온갖 나라 출신의 그만그만한 젊은 여자들이 떠들거나, 옷을 갈아입거나, 침대에 엎드려 있거나.


피사의 사탑은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큰 건축물이어서 놀랐고.

베니스에서는 관광객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현지 사람들의 골목을 걸어 다녔다.

창문에 장대를 걸어 골목 위로 빨래를 널어 말리는 풍경을 보면서,

베니스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해 보았지.

밀라노에서는 상가의 화려한 진열장에 눈을 박고 세련된 밀라노 패션을 구경했었다.

밀라노도 참 크더라.



밥도, 커피도, 아이스크림도 맛있고.

잔뜩 모양을 낸 남자들이 거리의 진열장을 거울 삼아

주머니에서 꺼낸 빗으로 조심조심 머리를 빗던 이탈리아.

로마의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는 이미 만원이 된 버스에 사람들이 몰려서 버스를 타겠다고 아우성인데.

밀려드는 관광객들과 상관없이 고단한 대도시 시민들의 일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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