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런던에 갔을 때,
서구 문화에 발을 디뎠다는 기쁨으로 꽤 흥분해있었던 것 같다.
어학연수로 여권을 발급받았는데,
런던에서 어학연수는 나의 목표가 아니었다.
당시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불가능한 시대라서,
나는 어학연수를 핑계로 유럽여행을 기대했었다.
런던 한복판에 있었던 어학원은 오전, 오후 수업이 있었는데,
겨울의 런던에서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구경 다니려면 금세 날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학원을 빠져나와 혼자 런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근처에 있는 영국박물관은 내가 자주 갔던 곳이었다.
얼마나 넓고 소장품이 많은지,
보고 또 봐도 모자라는 기분이었다.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갤러리도 여러 번 갔다.
벽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미술품들을 둘러보려면 다리가 저렸지.
해롯백화점도 맘에 들었다.
건물도 웅장하고 넓기는 왜 그리 넓은지.
맘에 드는 물건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색도 모양도 다양한 물건들은 게다가 포장까지 예뻤다.
바비칸센터 같은 대규모 복합 문화공간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던 건축 개념이어서 또 놀라웠다.
두리번두리번 많이도 걸었고.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또는 중간에서 내리거나 하면서 모든 것을 유심히 보았다.
그때 영국은 우리에게는 선진국이었고 따라가고 싶은 모델이었다.
경계가 없이 펼쳐진 넓은 공원은 정말 부러웠고,
크고 묵직한 근대기의 석조 건물들은 참 멋져 보였다.
가리의 자동차도, 서점도, 식당도, 카페도...
모두 모두 좋아 보이는 것 투성이었다.
한두 주일 지나가니까 한껏 흥분했던 정신이 좀 돌아왔다.
덜컹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삐그덕거리며 한참을 내려가는 시커먼 지하철은 겁이 났다.
물가는 비싸고.
언뜻 보면 고풍스럽지만 사실은 낡고 헤진 시설들이 눈에 띄었다.
빈곤... 도 있었다.
어느 날, 전철의 지상 구간을 지나가는데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를 우산 없이(이상하게 서양 사람들은 비가 내려도 우산을 거의 쓰지 않는다.) 맞으며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피곤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나 생활인은 고단하다.
비 맞으면 누구나 초라해 보인다.
런던 시내에는 새가 많았는데, 비둘기가 참 통통해서 그것도 신기했다.
그때는 비둘기까지 살이 쪘구나, 했었는데.
글쎄 살인지, 깃털인지, 체형인지, 모르겠다.
21세기 들어와 서울에서는 새 보기가 쉽지 않아서,
어머니는 그 많던 새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하셨었는데.
요즘에는 서울에도 시내(내가 말하는 시내는 강북 지역 도심) 한복판에서 갖가지 새들이 많이 보이고.
비둘기가 내가 기억하는 예전의 날씬한 모습이 아니라 동글동글 통통해 보인다.
그래서 런던의 투실한 비둘기가 떠올랐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런던의 이런저런 풍경들이 떠올랐다.
내가 런던을 좋아해서 그 뒤에도 여러 번 갔다.
갈 때마다 조금씩 다른 면이 보이기는 했지만.
처음 갔던 런던에서 좋아했던
넓고 푸른 공원들과 멋진 거리,
여전히 활약 중인 오래된 석조건물들.
창가의 레이스 커튼과 꽃들,
우중충한 날씨와 달리 알록달록 색색의 사탕들이 놓여있던 과자가게의 풍경들은 지금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