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생모리츠라는 알프스 휴양지가 있다.
3 천 미터가 넘는 높은 산에 엄청난 규모의 스키장 시설이 있고,
콘도와 호텔 같은 부대시설들이 있었다.
대규모로 개발된 호화스러운 분위기.
스키대회가 많이 열리는 곳이었다.
내가 갔던 1988년 1월, 푸니쿨라를 타고 산정으로 올라갔다.
하늘은 파랗고 날이 화창했는데 쨍쨍한 햇빛이 흰 눈에 반사되어 온통 빛에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산 위에는 스키를 타고 내려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웅성웅성 신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막상 슬로프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이더라.
높은 산을 쫙 밀어서 만든 스키장이 워낙 높고 넓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점점으로 흩어졌던 것이다.
산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은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다.
산 아래까지 한참을 내려가야 하니 준비물이 필요했겠지.
유럽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아랍 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소수.
동아시아 사람은 일본인 가족 같은 외모의 한 팀만 보았다.
여행자이던 나는 스키를 타러 그곳에 간 것이 아니었다.
내가 운동을 할 리가.
오스트리아 친구들을 따라서 자동차를 타고 갔는데.
가던 중에 오래된 알프스 산간 마을도 구경했다.
꼭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집 이층의 창문을 열고 "안녕^^"
인사할 듯한 동화 같은 마을.
집이 있고, 축사가 있고, 교회가 있고, 우물이 있었다.
비엔나로 돌아올 때는 기차를 탔다.
거대한 알프스의 구비구비를 돌아내려 가는 풍경이 정말 대단했다.
사진 속 풍경에 내가 들어왔구나, 했지.
알프스는 웅장하다.
기차선로 아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는데 위험하다는 느낌보다는
대자연 속을 내가 달려가고 있구나, 하는 기쁨이 충만했었다.
그 거대한 산 중간중간에 마을들이 있었다.
숲을 지나면
돌과 나무로 지은, 삼각 지붕이 있는 집들이 나란히 서서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는 또 숲, 눈 쌓인 초원.
다시 마을이 있다가는 또 초원.
그렇게 한참을 내려와 도시에 들어선다.
도쿄에서 멀지 않은 고산 지역에 가루이자와라는 휴양지가 있다.
나는 일본 근대 시기에 관심이 많아서 그 시기의 일본 소설을 많이 읽었다.
당시 일본 소설은 '사소설'이라고,
작가가 화자가 되어 실제의 자신과 배경을 상세하게 그린 소설이 많았다.
그런 소설 속에 근대기 엘리트들의 휴양지로, 부자들의 별장이 있는 장소로 자주 언급되는 가루이자와가 내 흥미를 끌었다.
나는 일본이 가진 장점으로 일견 수수해 보이는 세련된 취향을 꼽는다.
자칫하면 초라해지고,
넘치면 요란한데.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 품위를 지켜내는 세련된 수수함이 있다.
간혹, 아주 간혹 보이는 장점이기는 하지만.
그때 보기에 가루이자와는 그런 장점이 잘 실현된 동네 같았다.
내가 갔을 때는 여름 피서 시즌도 아니고,
가을 단풍 시즌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으며,
겨울 스키 시즌은 오지 않았던.
비수기의 평일이었고,
은근히 넓은 가루이자와 휴양지의 일부분만 보았을 뿐이니 다른 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성수기에는 사치품 가게들, 유명한 노포들의 지점들이 길을 메운다는데.
내가 갔을 때는 문 닫은 가게들이 많았고, 우선 관광객이 별로 없었다.
나는 한적한 길을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틈틈이 서서는 멀리 보이는 풍경을 구경했다.
가게들은 대체로 작고 수수한 차림새로 자연 속에 기대어 있었다.
자연은 자연대로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사람들이 조심조심 자연 속에 발 뻗을 자리를 얻은 느낌이랄지.
내가 볼 수 있었던 호텔이나 집들도, 다는 아니지만, 자연에 크게 거슬릴 정도로 거대하거나 요란하지는 않았었다.
가을이 지나가는 어느 하루.
조촐하고 잔잔한 풍경 속을 걷다가 밥을 먹다가.
다시 걷다가 차를 마시고 가게를 기웃거리며 작은 컵 두어 개 사들고 나왔던 하루.
한가하고 편안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