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5, 6학년쯤에 우리나라 축구는 전성기를 맞았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국민들은 흑백 TV 앞에서 응원하느라 동네마다 들썩거렸다.
차범근이 막내였던 그 시절에 활약했던 김세연, 이회택, 김재한 같은 이름이 기억난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축구 게임을 했다.
축구장과 선수들이 그려진 도화지 크기의 그림 종이를 문방구에서 팔았었는데.
한 장 사서는 골대의 테두리를 잘라 일으켜 세우고,
책받침 재질의 축구공을 볼펜으로 튕겨서 선수들을 거쳐 골대까지 넣는 게임이었다.
(그때 우리들은 종이 축구게임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었다.)
게임이나 잡기에 영 재주도 흥미도 없던 나까지 한동안 열을 올렸다.
그즈음에 나는 또 오목에 열중했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오목을 배워서는 푹 빠져버렸다.
바둑판이 있는 친구 집에 가지 않을 때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려서 연필로 돌 위치를 표시해가면서 친구들과 오목을 두었다.
우리 집에는 바둑판도 없었고 외가나 친가 모두 놀이 문화가 없었다.
나는 게임은, 하다못해 손수건 돌리기조차도 싫어하고 못하고.
경쟁, 승부... 상황에서 나는 가슴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도망치는 성향인데.
의외로 나의 오목 실력은 일취월장했으니.
바둑판 위에서나,
종이에 그린 오목판에서나.
나는 누구를 상대해서든 다 이겨버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때 우리 집 저녁 밥상은 기고만장한 내가 오늘의 승전보를 전하는 시간이었다.
아빠 그런 거 모르지?
아버지, "오, 대단하구나." 끄덕끄덕.
어머니,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쩜 그리 잘한다니."
말로는 칭찬인데 반응은 무덤덤.
상관없이 내 기분은 하늘을 날았다.
학교 성적에는 무관심했는데, 오목을 잘 두는 건 왜 즐거웠을까?
그러다 이기기만 하는 오목에 흥미가 식을 무렵.
아버지랑 언니, 아버지 친구분 해서 전주엔가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구경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버스 출발 시간이 남았다.
옆에 있는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갔다.
2층 방에서 식사를 기다리는데 바둑판이 보인다.
아버지가 바둑판을 끌어오면서 오목 한 판 둘까? 하시네.
어, 아빠 할 줄 알아?
학교 다닐 때 해본 적은 있는데 기억이 나려나.
아, 내가 가르쳐줄게! 야호~~~
결론을 말씀드리면 연전연패.
얼굴이 벌겋게 달아서 한 판만 더해.
씩씩거리면.
그러지 뭐.
그 한 판도 못 이기고 더 빨리 졌다.
어이구, 우리 딸이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가.
찡긋.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은 조용했다.
실내등을 꺼서 어두운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그동안 우쭐거렸던 내 모습들을 떠올리고.
그런 딸을 부추기거나 꾸짖지 않은 채 가만히 보고만 계셨던 부모님이 고맙고 부끄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지난 내 모습을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어머니 병간호를 하며 힘들었지만.
내가 겪는 어려움이 어머니의 마지막 가르침이라는 생각을 했다.
평생을 부모님 품에서 살아 뭘 모르는 딸.
말로는 가르칠 수 없는 안타까운 자식을,
그러나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어서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어머니의 병간호를 통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뜻이라 생각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새해를 맞이하며 읽은 별자리 운세에
"당신은 이제 고통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생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는 구절에 눈이 갔을 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내게 가르쳐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고통이 어떤 것인지.
세상에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
삶을 이해하려면 꼭 알아야 할 그것들.
병으로 고통받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내가 진정한 어른으로 훌쩍 자란 기분이다.
동시에 어른으로서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인생의 무게도 내 등에 얹혔다.
잘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