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에서의 한나절

by 기차는 달려가고

화창한 아침이었다.

모처럼 잠을 푹 자고 상쾌하게 깨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창경궁으로 갔다.


도로는 언제나처럼 밀리고

내리쬐는 아침 볕은 눈이 부셨.

다급한 경고음을 울리며 대학병원으로 들어가는 구급차들.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바쁘게 걸음을 옮겨 자동차들이 가득 메운 큰길을 건너서.

드디어 높은 담장의 붉은 문으로 들어선다.

휴,

문 안으로 들어서니 완전히 달라지는 세상.



창경궁은 넓다.

그리고 대체로 자연스럽다.

단정한 붉은 건물들은, 그러나 규율의 엄격함에서 환경에 융통성 있게 응용되었고.

수풀은 무성하면 무성한대로,

수북하면 수북한대로 놓여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인위적인 손질을 받지 않은 회양목은 키를 넘겨 자랐더라.

줄기들이 휜 굵은 소나무가 늠름하구나.


우거진 나무와 꽃들은 한여름의 절정을 지나 이제는 쇠해가는 시기.

이파리는 윤기를 잃고 수그러드는데 다들 제 나름 색색의 열매들을 맺고 있었다.

알차게들 살아냈구나.

전염병으로 세상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문 닫힌 고궁의 뜰에서 이들은 인적 끊긴 자유와 평화를 한껏 누릴 수 있었겠지.



반듯반듯 놓인 정전과 침전들은 문들을 활짝 활짝 열어젖혔다.

길고 고단했던 여름날, 잔뜩 습기를 머금은 건물을 앞뒤를 오가는 솔솔바람이 말려주고.

그러다 쾅, 바람결에 밀린 여닫이문이 닫혀버리기도 하더군.


고양이들은 느릿느릿 뜰을 오가고.

마스크로 얼굴이 가려진 사람들은 연못가에 드문드문 자리를 잡아 초가을의 청명한 오전을 누린다.

긴 꼬리가 아름다운 까치가 나무 사이를 훌쩍훌쩍 날아다녔다.

뚱그덩 뚱땅, 비단 현을 뜯는 가락이 바람결에 흘러 다녔다.



자박자박 뜰을 걷는다.

이 자리에서 수백 년.

누가 어떤 사연으로 이 길을 걸어갔을까.

여느 백성들처럼 추운 밤 땔감을 걱정하고 어린 자식의 배고픔을 두려워하지는 않았겠지만.

더없는 비정과 욕망으로 결코 낙원도 될 수 없었을 이 곳.

뒤주에 갇힌 자의 눈물이 흐르고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자들의 비탄이 고여서 개울을 이루었을지도 모르지.


오래전에는 시끌시끌 세속의 한가운데였던 이곳이

지금 서울에서는 저세상의 한가함을 누린다.



담장 하나 사이에 다른 세상.

어쩌면 의외로 마음의 평화는 쉬울지도 몰라,

입장료 천 원에,

붉은 문으로 들어서겠다는 마음과 얼마간의 시간.

그리고 단지 당신이 움직이는 몇 걸음.


세속의 소리는 아득히 사라지고

풀내음 가득한 옛 뜰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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