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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Dec 08. 2019

양키 물건 - 미국을 선망함.

음식에 관한 단상 5

새 학년이 되었다.

입을 꼭 다물고 새초롬한 표정으로,

낯선 친구에게는 절대 먼저 말 거는 일이 없었던 나.

성격 좋은 한 아이가 먼저 다가와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더 친해지면서 친구는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덜렁덜렁 책가방을 들고 재잘재잘 떠들면서 즐겁게 도착한 친구 집에서,

친구는 조심스럽게 마루에 있는 자개 장식장을 열쇠로 열고

선반에 있던 '탱' 주스 가루를 꺼내 컵에 덜고 물을 부었다.

머뭇머뭇 내가 주스 마시는 모습을 눈동자를 반짝이며 쳐다보던 친구.

수돗물 맛이 강했던,

밍밍한 맛을 얼른 삼킬 수 없었던 나.


아이는 친구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아끼는 주스를  꺼내

엄마가 하는 대로 주스 가루를 아주 조금 넣었겠지.

안 먹으면 안 먹지 먹을 때는 제대로 먹는다-는 주의인 우리 집에서는,

맛과 색이 잘 날 만큼 충분한 분량을 넣었기 때문에 친구가 타 준 '탱 주스' 맛이 영 아니었던 거였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

일반 소비재 수입이 금지되어 있던 시기에 캐나다에 갔었다.

쇼핑몰은 거대했고 체육관 만한 슈퍼마켓은 상상을 넘는 규모로,

전에 다녀온 유럽이나 일본과는 다른 차원의 압도적인 크기와 물량이었다.

가정부 일을 하러 동남아 지역에서 온 어느 부인은 커다란 슈퍼마켓에 쌓인 엄청난 물건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여긴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우리 아이들은 먹을 게 없는데..."


경제 성장은 쭉쭉 뻗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초라하고 뒤쳐진 개도국,

군인들이 폭력으로 권력을 잡은 억압적인 체제 하에 있었던 80년대 한국 여행객인 나도 심정이 좋지 않았다.

우리가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떳떳하지 못한 경로로 구입하는 '양키 물건'들이 이렇게 싼 가격에, 동네마다 발에 차이는 거였구나.

뒤통수를 얻어맞은 불쾌함.

뭔가 속은 느낌.

'탱 주스 가루'에 황송해했던 초등학생의 기억이 문득 떠오르면서 기분은 더 어두워졌다.



아무리 공공연하게 팔린다지만 양키 물건은 명목상으로는 불법적인 거래여서,

조금이라도 떳떳하지 않은 일은 못하게 했던 아버지(이제 돌이켜보니 아버지는 나중에 내가 캐나다에서 느꼈던 불쾌감을 이미 느끼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조르는 우리를 쳐다보며 포기한 듯 짧은 한숨을 쉬고 '까불이 아저씨'에게 또 전화를 했다.

양키 물건을 취급하는 '까불이 아저씨'는  자전거를 타고 와서 뒤에 실었던 레이션 박스를 내려놓고 돈을 받아 갔다.

상자 안에는 우리가 주문한 이다 초콜릿(지금도 잘 팔리는 판형 초콜릿을 왜 그렇게 불렀는지?), 오레오 과자, 새알 초콜릿, 드롭프스, 리츠 크래커에 건포도, '탱 주스', 코코아, 치즈, 버터, 케첩, 통조림 같은 먹을 것들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벙글벙글 손에 쥐고, 입에 물고 신났다.


입이 꼭 휘파람을 불고 있는 모습이던 '까불이 아저씨'는 늘 유쾌한 표정이었다.

소풍날이어서 특별히 원하는 것을 고르도록 직접 가게로 갈 때도 있었는데,

상가 안에 있던 조그만 좌대 위에는 상관없는 아무 물건이 허술하게 놓여있었다.

원하는 제품을 말하면 아저씨는 진열대 아래에서 물건을 꺼내 주거나.

"잠깐 기다려~" 하고는 바람처럼 달려가서 가슴에 물건을 품고 나타나곤 했다.


'양키 물건'은 미군 px에서 미 군속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물건들이,

군속 가족을 통해 시중으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손을 거칠 때마다 물건에는 마진과 위험수당이 붙어서 최종 소비자가 지불해야 하는 가격은 매우 높았고,

그에 더해 불법이라는 꺼림칙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사게 되는 이유는 시장에는 그만한 제품들이 없어서 아이들의 성화를 어머니는 이길 수 없었으니.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입단속을 시키면서 '까불이 아저씨'의 단골 고객이 되었다.


외제품 불법 거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옛날 방물장수처럼.

고위층, 사업가 집을 다니면서 보석, 고급 의류, 모피, 그릇 같은 밀수품을 파는 부인들이 있었다.

그 남편들이 불법을 단속한다고 국민들에게 으름장을 놓을 때,

그 부인들은 태연하게 홍콩에서 왔다는 보석을 고르고,

사업가 부인은 대금을 치렀다.

명동의 고급 옷가게들에는 밀수된 고급 옷과 가방, 신발들이 국산 제품 한 겹 뒤에 걸려 있었는데.

여고, 여대 동창회에선 일제 그릇, 독일제 냄비 계도 했는데?



가난해서, 초라해서, 배운 게 없어서.

영어를 못해서, 덩치가 작아서, 모르는 게 많아서.

부패해서, 독재 국가라서, 자유가 없어서.

공정하지 못해서, 정의롭지 못해서...

강대국 미국에, 잘 난 서유럽에, 약싹 빠른 일본에,

부끄럽고 주눅 들고 움츠러들었다.

잘 나고 싶다는 급한 마음에 껍데기라도 뒤집어썼겠지.

그들의 모든 걸 선망하고 갈망하고 욕망해서 막 터질 것 같았던 시대.

그래서 앞뒤 가리지 않고 달리기만 했던 시간들.



꼬박 병든 어머니 곁을 지키면서 외출도 못하고,

호흡이 긴 책을 읽을 체력도, 여유도 없었던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세계 여행을 다니는 청년들의 블로그들을 찾아 읽었다.

많은 청년들은 당당하게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구김살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찬찬히 세상을 알아가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표면과 이면을 살피면서

동시에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았다.

우리가 해낸 민주적 성취, 사회적 성과를 평가하면서 청년들은 우리나라에 자부심을 가졌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나는 우리 세대가 행한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행태에 실망하면서.

우리 세대 또한 생계에 매몰된 '실패한 세대'라 단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혼돈 속에서 그래도 이뤄낸 게 있었구나.

좌충우돌 극성스럽게 달려오면서 우리 세대는 꽤 많은 장애물들을 극복해왔구나, 싶다.

그 시절에 부러워했던 것들을 지금은 많이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만큼 극복하기까지 우리 세대가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우리끼리는 안다.

막상 당사자들은 여전히 열등감에 빠져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당당하고 구김살 없이 잘 자란 자식들을 낳고 키워냈으면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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