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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Nov 05. 2020

지옥으로 돌아가는 오세키

활자로 만난 인물들

단편 [십삼야]

일본 근현대 여성문학 선집 1,

히구치 이치요, 어문학사, 김효순 옮김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근대기 소설가이다.

1872년 도쿄에서 태어나 1896년 사망했다.

24년이라는 짧은 시간.

아버지 돌아가시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힘겹게 살아가면서,

생의 마지막에 좋은 작품들을 남겼다.


도쿠가와막부 체제가 끝나고, 개항하고. 권력과 신분 체계와 사회의 모든 것이 뒤바뀌어 새로운 세상이 열렸던 19세기 말기에.

자신이 살아간 도쿄 서민 동네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가의 소설들도 좋은데.

나는 작가가 어릴 때부터 써온 일기에서 볼 수 있는,

청명한 마음과 추상같이 엄격한 삶의 자세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오세키'는 단편 '십삼야'의 주인공이다.

착하고 순하고 예쁜 오세키는 가난한 부모의 랑스러운 딸이었다.

오세키 열일곱 살에,

부모가 돌아가시고 큰 재산을 상속받은  하라다의 눈에 띄었다.

오세키 부모는 딸이 나이도 어리고 혼수 준비도 안 되어 있으며.

신분의 차이가 크다고 청혼을 거절했으나.

하라다는 아무것도 필요 없고 오세키만 있으면 된다,

평생 귀하게 대접하겠다고 강력하게 우겨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달맞이 풍습이 있는 '십삼야' 밤에 오세키는 혼자 친정을 찾아온다.

처음으로 부모에게 결혼 생활의 실상을 고백한다.

남편 하라다는 결혼하고 반년 뒤부터 돌변했다.


".... 잔소리는 끊임이 없고... 무식한 것 하며 멸시를 해요.... 배우게 해 주면 될 것을, 그저

친정이 변변치 못한 집안이라는 것을 대놓고 떠들어대서....(128쪽)"

철없는 아이가 예쁜 것을 보면 무조건 갖겠다고 떼를 쓰다가.

막상 손에 쥐면 곧 관심이 사라지거나 못살게 굴듯이.

욕심만 있을 뿐, 사랑할 줄은 모르는 하라다.

흥미가 떨어진 오세키를 버리고 싶은지 아내에게 끊임없이 모멸감을 주며 괴롭힌다.



그러나 어린 아들 다로가 있어 쉽게 집을 나올 수도 없는 오세키.

"저는 어두운 계곡 속에 떨어진 사람처럼 따뜻한 햇빛을 본 적이 없어요."(129쪽) 

비열한 남편은 오세키를 아들의 유모로서 집에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비웃는다.

그런 학대를 받으면서도 오세키는,

"다로가 엄마 없는 아이가 되는가 싶어서 무슨 일이든 잘못했다고 비위를 맞추며, 오늘날까지 참고 견디었어요."(130쪽)


남편은 '악마'.

오세키는 이혼을 결심하고 오늘 밤, 친정부모를 찾아온 것이다.

오직 딸의 행복을 바라며 딸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살아온 부모는 가슴이 어지지만.

아버지는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

이혼을 하여 신분이 떨어지고 가난해진 엄마는 다시는 아들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악마의 소굴에서, 엄마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다로가 어떤 처지에 놓일지.



인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좋은 것이 왔나, 반기다 보면

어느새 나쁜 것으로, 힘든 것으로 바뀌어있다.

아니 바뀐 건 아닐지도 모른다.

좋은 것 안에 필연적으로 들어있는 또 다른 측면을 이제야 알아보게 되었을 뿐.


고난에서 도망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제대로 마무리짓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고난이 될 수 있지.

문제는 오세키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지옥에서 버티는 동안,

자신을 얼마나 잘 지켜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겠다.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잘' 견디어내야 한다.

견디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고통을 발판으로 배움을 얻고 자신을 성장시켜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괴롭히고 밀어내려는 하라다 가문에 붙어서 치욕을 견디는 모멸의 시간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고통을 끌어안고 고통을 발판으로 자신을 키워낼 것인가.

고통에 짓눌려 미쳐가고 파괴될 것인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지옥 같은 집으로 돌아가는 오세키는,

연정을 품고 있던 오세키를 잃고 타락해버린 로쿠노스케의 인력거에 타게 된다.

감당하기 어려운 좌절에 맞닥뜨려서 철저히 망가진 로쿠노스케.

지금 모습이 오세키의 미래는 아니겠지.


착하고 고운 마음을 지키면서 오세키는 이 시련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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