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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Oct 29. 2020

식민지 청년 구보 씨

활자로 만난 인물들

[박태원 단편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정환 책임편집, 문학과 지성사



나긋나긋한 예전 서울 말씨가 마치 귀에 들리는 듯 생생한 박태원의 이 소설은 1934년에 발표됐다.

당시 식민지 경성, 사대문 안의 도시 풍경과 사람들의 생활이 세세하게 드러나서.

마치 내가 고개를 내밀어

황금광 중개인들이 포진하고,

‘팔뚝시계’와 ‘벰베르크 실로 짠 보일 치마’를 욕망하는 처자들과.

결혼 비용 삼천 원, 신혼여행은 동경으로, 관수동에 그들 부처를 위하여 개축된 집!     

을 선망하는 젊은 사람들이 둥둥 떠다니던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구보 씨는 소설을 쓴다.

스물여섯.

직업은 없다.


'늙은 어머니에게는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거리였다. 우선, 낮에 한번 집을 나서면, 아들은 밤늦게나 되어 돌아왔다.'(89쪽)


말이 없어 속을 알 수 없는 아들이 애달픈 어머니.

구보 씨는 글을 팔아 번 돈으로 어머니와 형수의 치맛감을 끊어주는 다정한 아들이다.

또 '어머니의 사랑은 보수를 원하지 않지만,

그래도 자식이 자기에게 대한 사랑을 보여줄 때, 그것은 어머니를 기쁘게 해 준다.'(92쪽)

는 사실을 이해하는 속 깊은 아들이다.

공부도 할 만큼 , 착한 우리 아들이 왜 취직을 못하는지 어머니는 의아하다.

때때로 결혼도 해야 하지 않나, 아들의 눈치를 살핀다.



구보 씨는 밤에 글을 쓰고 오전 늦게 일어나 밥 한 술 뜨면,

등 뒤로 어머니의 말을 흘린 채 집나선다.     

두 발로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딱히 한 군데 갈 곳은 없는 신세.     

거리를 걷다가 화신백화점이나 서울역에 들르기도 하고.

미녀를 데리고 월미도로 놀러 가는 전당포집 아들인 동창과 마주쳐서는 불편한 심사가 .


내릴 데를 찾지 못하는 전차도 탔다가. 친구들을 만나려 하다가.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시간을 버리기도 하고.

직장이 있는 친구헤어지면서 자신의 집으로! 간다는데,

‘대체 누구와 이 황혼을 지내야’(128쪽) 하나, 구보 씨는 망연하.    


    

태어나자마자 나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머리에 든 것과 초라한 현실과의 괴리에 짓눌린 청춘들은 겉늙은 듯 우울하고 지쳐있.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자는 어머니의 기대를, 어느 하나 이룰 수 없는 아들은 그저 송구스럽기만 하다.

   

종일 서울의 여기저기를 헤매 다니고.

자정이 넘도록 종로 거리를 머뭇거린다.  

자영업자는 운영이 어렵고.

문인들조차 황금광의 열풍에 휩쓸려 있는.

이성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은 상념의 한가운데를 불쑥불쑥 쳐들어오고.

돈과 시간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인 여행을 선망하지만,

그림 속 이국 풍경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단벌 옷, 한 켤레 양말과 한 벌 구두- 당장 몸에 걸친 것뿐인데.

우산 없이 부슬부슬 비가 내리니 사람들은 내일 입을 것을 염려하고.



80년 사이에 우리 사회는 천지개벽으로 바뀌었는데.

갈 길이 보이지 않는 청년들의 막막한 처지는 반복된다.

침울하고 답답한 기분이 구보 씨를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희망하고, 그것을 잘 해내겠다는 단단한 의지가 있다.


발목을 잡아끄는 좌절감을 떨쳐내면서 구보 씨는 경성 거리를 꼼꼼히 돌아다니고.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았으며.

사람들의 심경을 찬찬히 헤아렸다.

그래서 시대와 사회를 담백하게 그려낸 이 소설을 남길 수 있었겠지.


구보 씨는 옷만 후드티나 기모 바지로 바꿔 입는다면,

지금 당장 서울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우리들의 초상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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