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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Dec 18. 2020

어느 만큼 사랑이었을까?

활자로 만난 인물들

[The  Great GATSBY],

F. 스콧 피츠제럴드 씀, 이정서 옮김, 새움출판사



예전에 읽었던 소설을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보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혹은 전에는 소홀했던 부분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고전이고 명작인가 보다.

즉, 작가는 대개 인물들의 언행을 통해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지만.

거리 풍경이나 집,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심한 동작 같은 미미하지만 정밀하게 배치된 도구를 통해서도 작가는, 

인물들만으로는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시대와 인간사의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전에 김욱동 교수가 옮긴 민음사 번역본으로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다.

이번에는 이정서가 번역한 새움출판사의 [The  Great GATSBY] 도서관에서 빌렸다.

소설 뒤편번역자는 상당 분량을 할애해서 김욱동, 김영하 번역본 오류를 상세하게 지적하고 있다.

쉽게 생각해서 행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문화권, 다른 언어의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충실하게 내용을 전달하고.

더해서 문장의 유려함까지 성취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생각하게 되었다.

유난히 우리말로 번역이 어려운 문장을 쓰는 영미권 저자들이 있는데.

소설의 문체라든가 조크, 중의적인 표현을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옮기는 작업은 난망해 보인다.

번역은 이전 것들보다 훨씬 정확하다고 믿겠는데,

문장은 뻑뻑하다.



[위대한 개츠비]는 지금부터 한 세기 전,

미국 뉴욕을 지리적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세계 일차 대전으로 유럽 주도의  질서는 붕괴되고,

미국이 세계 제일의 국가로 부상하던 시절.

공평한 질서보다는 우격다짐어두운 결탁으 막대한 부를 쌓고 행사하던 시절에.

우주의 중심인양 뉴욕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막대한 재물을 쌓은 선두주자들에게 넘치는 부유함.

화려한 집, 멋진 자동차, 보석, 옷.

그리고 지독한 권태.

유럽, 미국 동부와 서부를 불안하게 떠돌고.

습관적인 간음과 술과 산해진미로 흥청망청 소모되었다.

그리고 이를 따르는 부나방 같은 일군의 사람들.


예전에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개츠비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에 상당히 냉소적었다.

그가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해왔던 이른바 데이지에 대한 '사랑'이란.

데이지라는 이름의 이기적인 황금 소녀에 투영한 자신의 동경 혹은 욕망으로 보였다.

특정한 인간에 대해 느끼는 매력이 약간은 있었겠지만.



그가 보이지  않는'가시철망'을 넘어 바닷가에 무엇을 흉내 낸 성을 쌓도록 몰아 댔던 사랑이란-

실은 상당 부분이 번쩍거리는 상류사회에 대한 동경, 날뛰는 호르몬,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열패, 인생과 세계에 대한 판타지...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의 화학작용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쟁취하고 싶은 트로피로서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집착했다 생각했었다.


사랑이라는 절대적인 감정을 낱낱이 분해한다면,

'지고지순'과 '한 인간의 고귀함'의 지분은 얼마나 될까?

부족하고 허물 많으며 협량하고 경박하고 이기적인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여 깊은 인간적 유대감을 이루다는 바람은 얼마나 헛된 기대인가.


나이가 든다고 사랑에 대한 갈망이나 관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젊은 날보다 더 클 수도 있다.

다만 당장 급박한 내 처지에 온신경이 쏠려있거나.

잠깐 빠졌던 감정의 환상에서 얼른 벗어난다든가.

야박하고 이기적인 인간성을 파악했거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보다는,

자신이 손해 볼 수 없다는 속셈 또는 상처 받지 않으려는 방어작용만 강해진 때문에,

사랑에 대한 기대는 증발하고 욕구만이 남았겠지.



이번에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도 개츠비의 데이지를 향한 사랑에 대한 나의 의견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는데.

적법하지 않은 사업을 하면서도 여전히 제임스 개츠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개츠비는 다시 보게 되었달까.

초조한 듯 뉴욕 서성이는 개츠비의 모습에 마음이 쓰려서 책을 여러 번 덮어버렸다.


동시에 먼저 부자가  선대를 두었을 뿐인데 

함부로 살아도 된다는 천부의 자격이나 움켜 듯 거만한 그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개츠비에게 잔인하고 야비하더니.

자신들의 죄악을 뒤집어 씌워서는 산산조각 부서 버리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기억에서 사실을 조작해내는 몰염치하고 비열행태란.


허위와 비겁, 우월감인 듯 위장된 열등감.

우둔하면서도 자기들만의 이익에는 약삭빠른 그들환멸을 느끼면서.

뉴욕을 떠나버리 화자인 닉의 심경에 내가 격하게 동조하는 것은,

요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와도 관련이 있겠지.



요모조모 따져보고 다시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어느 문장 하나도 허투루않더라.

100년 전의 돈을 향한 탐욕지금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돈을 어떤 위치에, 어느 만큼의 자리에 둘 것인가, 판단하는 한 시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개츠비는 꽤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지독히 허무한 도시, 저편에서 반짝이는  불빛에 대한 그의  동경에 아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덧붙여,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짊어질 수 없으면서 부유함의 등에 올라탄 여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이란,

예나 지금이나 물질을 쫓는 자신의 행적을 사랑이라 속삭이는 것.

정말 그렇게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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