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서 바라보는 네 계절, 가을
마음에 남긴 풍경들
계절의 변화를 우리 조상들은 24절기로 구분했다.
절기는 우리가 체감하는 계절보다 빠르다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가을에 들어선다는 입추는 무더위가 한창인 8월 초순에 있다.
역학에서는 계절이 바뀌는 첫 절기를 하늘의 시간이라고 한다더라.
기차를 타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하늘의 시간을 이해할 것 같다.
입춘인 2월 초.
들판에는 눈이 얼고 맹렬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엄연한 겨울인데.
하늘이 환해지고 차가운 공기에는 아른아른 봄기운이 비춘다.
꽁꽁 얼어있던 땅은 푸석푸석 부풀어 오르지.
누렇게 말라붙은 풀더미에는 아주 아주 작은 꽃들이 고개를 내민다.
여전히 찬바람이 윙윙 몰아치는데.
가을도 그렇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더위가 한창이고
무겁고 짙은 녹음이 산과 들을 뒤덮은 쨍쨍한 8월 초에 입추가 있다.
그즈음에 쭉쭉 거세게 성장해온 나무와 풀들은 기세를 멈춘다.
물기가 촉촉했던 초록빛 윤기는 점점 마르는 듯하고.
활짝 활짝 위로 뻗어나가던 푸른 이파리와 휘영청 무거운 가지는 방향을 틀더라.
아직은 조그맣게 달려있는 파란 열매들.
위로, 위로, 성장의 시간을 보냈던 생명들은 이제 열매에게 힘을 모은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 오는 것이다.
서울을 떠나 한 시간쯤 달린 기차 안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 도시의 찌는 더위에 지친 여름날에,
결국 이 여름은 끝나가고 저기서 가을이 다가오는구나,
나는 알게 되었다.
어서 와라 가을.
땅에도, 사람에게도 가을의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된다.
가을은 짧다.
그 사이에 풍경은 정말 빠르게 달라진다.
낮에는 조르르 땀이 맺히지만 아침저녁 선선하다가.
곧 푸른 하늘이 드높고 청명하며
길가에는 한들한들 색색의 코스모스가 무리 지어 피고.
솔솔바람이 불어오고 시원한 날씨가 되나 싶더니.
금세 들판은 황금물결.
모든 것이 쾌적하구나.
풍요로운 결실까지 얻으니
흥겨운 기분으로 덩실덩실 이 가을을 즐기자.
산은 붉은 빛깔, 노란 빛깔.
참으로 아름답다.
...
기쁨은 잠시.
곧, 마르고 찬바람이 불어온다.
이제는 갈무리를 할 차례.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아름다운 빛깔로 한껏 화려하던 나무는 모든 영광을 떨쳐내고 한층 굵어진 꼿꼿한 줄기만 남긴다.
머물지 않는다.
미련 없이 훌훌 덜어낸다.
나무의 영광은 몸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었다.
그 어느 것도 남의 것을 가져다 일부러 치장하지 않았다.
본분대로 힘껏 살다 보니 스스로 맺힌 열매들이고,
스스로 우러난 아름다움이었다.
활활, 생명의 본분대로 살아내다가 가을이 끝나면 자신의 본질, 목숨의 핵심으로 돌아간다.
붙들지 않는다.
이른 아침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저수지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늦은 가을 풍경을 보았다.
선선한 아름다움이었다.
곧 사라지겠지.
혹독한 겨울이 올 것이다.
죽음과 같은 겨울을 힘겹게 견디고.
생명이 부활하는 봄,
절정의 여름을 겪어냈으며.
그 모든 것들을 지내고 결실을 얻었다.
담담하게 가을을 떠나보낸다.
풍성했던 이파리들을 모두 떨쳐낸 검은 산은 능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떨어진 이파리들은 형체를 잃으면서 썩어가겠지.
그러나 몸에 품었던 영양분은 땅에 남기니.
열매가 담은 씨앗과 풀숲에 숨겨진 수많은 벌레의 알들은 죽음과 같은 추위 속에서 살아남아,
봄에 부활하리라.
기차에 앉아서 나는 뭉뚱그려진 하나의 풍경을 바라볼 뿐인데.
풍경 안에서 생명의 움직임이 치열하리라.
지금 이 순간, 이 풍경은 찰나일 뿐이고.
모든 것은 쉴 새 없이 변해가고 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