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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Feb 03. 2021

짓밟히다.

활자로 만난 인물들

[바덴바덴에서의 여름 ],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민음사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한낮의 기차를 타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이었고, 그 절정인 12월 말이었으며, 게다가 기차는 북방의 레닌그라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창밖은 빠르게 어두워져 갔다. 모스크바 근교 역사들의 환한  불빛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던진 것처럼 다만 뒤로 흘러가고, 눈 덮인 교외의 플랫폼에는 깜빡이는 가로등들이 타오르는 띠 하나로 이어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31쪽)



겨울날, 화자는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인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로 가는 중이다.

화자의 손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1867년, 아내와 유럽으로 여행 갔을 때.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카야가 쓴 일기책을  

들고 있다.


이모로부터 빌렸던 낡은 책.

화자는 책에 전율하여.

책을 돌려주는 대신, 다시 제본하려고 온 모스크바를 뛰어다니고.

이미 본 곳을 또 훑어 읽고, 성경처럼 간직했었다.

그래서 화자는 지금의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대가가 살았던 당시의 도시 이름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길이라고 다.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한 도스토예프스키 부부는 빌나에 도착한다.

서비스가 필요하지 않냐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유대인 소년들에게 시달리고.

하루 이틀 뒤 베를린을 거쳐 드레스덴 도착하여 직접 집을 빌리러 다닌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화자,

어린 신부의 어머니 물건을 저당 잡혀 가까스로 마련한 돈으로,

페테르부르크를 떠나야 했던 도스토예스키 부부의 어려운 사정과.

독일의 무지막지한 상인들로부터 바가지를 쓰거나 조롱을 당하면서,

돈에 쪼들리는 힘겨운 여정을 따라간다.



대가를 흠모했참한 처녀.

고 따뜻한 사랑으로 참아내고 감싸 안으려 하지만,

남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시베리아에서 비참한 유형을 겪어내야 했고 거주할 곳을 구걸해야 했다.

문단에서는 정중한 척, 그를 모욕한다.

살아내려 견뎌야 했던 비굴함과 치욕은 남자의 영혼과 마음을 깊게 난자하여 걸핏하면 분노를 터트리는.

여전히 철철 피 흘리며 고통받  중년의 남자는.


그는 침대 끝에 누운 채 온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일어나 앉고 싶지만 그를 침대에 결박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밧줄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새파랗고, 입에서는 거품이 끓고 있었다.(53쪽)



작가는 도박에 탐닉한다.

써내야 하는 글도, 당장의 배고픔에눈을 감고,

갖고 있는 부부의 소지품을 차례차례 전당포에 맡겨서 받은 푼돈을 카지노에서 탕진한다.


요컨대 그는 검은색의 베를린 프록코트와 바지를 입은 채 기묘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길게 늘인 검은 타이즈를 신고, 검은 실크 모자를 쓰고, 흰 장갑을 낀 피에로가 되었다. 그는 약혼반지와 옷과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가죽 모자를 교묘하게 위로 던져 올리고는, 허공에서 절묘하게 그것들을 낚아채면서 저글링을 하는데. 때로는 여기에 자기의 검은 실크 모자를 끼워 넣기도 했다.(163쪽)


하지만 그가 공중에 던지는 물건들은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자기 실크 모자를 로 던지면, 그것은 허공에서 문득 사라져 버리고, 베를린 양복으로 변한 타이즈 역시 허공 어딘가에서 문득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164쪽)



책 속의 도스토예프스키에 몰두하던 화자는 칼리닌을 지나면서 고개를 든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도스토예프스키가 처음 내렸던 곳.


기차는 다리를 지나가면서 경적을 울렸다. 나는 책에서 눈을 떼 얼굴을 창에 가까이 붙이고는, 환한 불빛을 가리기 위해 말의 눈가리개처럼 손바닥을 얼굴에 갖다 댔다. 아직 저녁 무렵, 그것도 이른 저녁 무렵이었다. 겨울밤의 어슴푸레한 흰빛 사이로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들이 촘히 보였다. 승강구의 문들이 덜컹거리고, 내리려는 승객들은 손에 가방을 들고 출구로 나가기 시작했다.... 기차는 칼리닌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61쪽)



화자는 미국으로 추방된 솔제니친과 소련 안에서 항거하던 사하로프 박사를 떠올리게 하는 당시의 반체제인사들을 언급하는데.

그러나 정부 기관지를 읽으면서 들이켜는 대중들은 그들에게 찬사 대신 오히려  혐오를 다.


부부가 드레스덴 박물관에서 보았던 그림 <시스틴마돈나>와 <그리스도의 모욕> 반복고.

광범위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 속 인물들과 내용을 거듭 인용하면서.

화자는 대가가 겪어냈던 수난을 보여준다.

짐짓, 지나간 세기의 작가가 겪었던 일일 뿐이라는 듯이.



기차 안에서도.

도착한 페테르부르크에서도.

화자는 작가와 작품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자신이 머무는 길랴 아주머니 댁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슬쩍 유대인이 당했던 잔혹한 일올리기는 하지만.


올바른 위정자는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려 애쓰는데.

히틀러나 스탈린은 사회적인 갈등 자신의 권력을 굳히는데 이용하려 든다.

그들에게 인간이란 단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할  수단일 뿐이다.

작가는 자신이 평생 겪어왔고 지금도 고통받는,  나치에서 소련으로 이어지는 유대인 핍박을 언급하는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작품을 통해 근본적인 인간성과 고통을 이해하려 든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다.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고.

다듬고, 다듬고, 또 다듬어서 마침내 투명하고 단단한 정체가 된 작가의 영혼 같은 글.


그 시절, 바덴바덴의 풍경을 볼까?

화자는, 즉 작가 치프킨은 유대인에 대한 해외여행 금지 조치로 끝내 러시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창밖으로는 벽돌 바닥에 부딪는 말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지나다녔고. 저 멀리 붉은 벽돌집의 뾰족한 지붕 너머에는 태양이 지고 있었다.(95, 96쪽)


아카시아 꽃의 향기와 환한 햇빛, 그리고 길에서 따각거리는 말밥굽 소리, 여자들이 마당에서 간헐적으로 질러대는 큰  소리들, 아니면 물이나 맥주를 운반하는 마차의 굉음 같은 거리의 소음들이 방으로 넘쳐 들어왔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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