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수 십 년 동안 매 끼니 다른 식단으로 우리 집 밥상을 차려내셨다.
지루한 것, 뻔한 것, 구태의연한 것을 싫어하시는, 창의력 높은 어머니는.
하루 세 끼에 밤참까지,
우리는 늘 갓 만든 새로운 음식을 먹었다.
장아찌나 밑반찬은 우리 집 밥상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반찬들이다.
미리 만들어 놓는 음식은 김치와 젓갈 정도.
내가 살림을 전담하게 된 뒤에 비로소 장아찌의 세계에 눈을 떴다.
(장아찌와 밑반찬이 있으면 밥상 차리기가 훨씬 쉽다는 걸 알았다.)
나는 매실 장아찌, 마늘장아찌, 매운 고추장아찌를 즐겨먹고,
김밥에 단무지 대신 짭짤, 새콤, 아삭한 무장아찌를 넣는다.
다양하고 새로운 밥상을 차려내신 어머니는 반찬만 다양하게 하는 게 아니라
밥 또는 밥에 준하는 탄수화물 음식도 다양하게 변화를 주셨다.
심심한 흰쌀밥에 국이나 찌개, 김치 한두 가지, 반찬 댓가지가 기본적인 밥상이었지만. 그 풍성함을 지키는 선에서 밥상은 종종 색다른 변주곡을 연주했다.
찹쌀, 콩이나 팥, 차조, 보리, 감자, 고구마를 넣은 잡곡밥.
들기름에 달달 볶은 김치와 쌀을 끓이다 소고기 고명을 얹어 참기름이 듬뿍 들어간 양념장에 비벼먹는 김치밥.
콩나물과 다진 소고기가 들어가는 콩나물밥. 김치밥과 콩나물밥은 밤참으로도 베스트!
색감도 화려한 비빔밥.
산같이 쌓아놓았던 김밥에.
냉장고에 남은 재료로 뚝딱 만드는 볶음밥.
도시락으로 많이 가져갔던 오므라이스.
김 가루 또는 삶은 계란 가루에 굴린 동글동글 주먹밥.
아이들이 예고 없이 친구들을 데리고 오면 어머니는 급히 카레를 끓이고
과일과 채소를 다듬어 마요네즈 드레싱을 얹은 샐러드를 만들고 돈가스를 튀겨내셨다.
맨날 밥만 먹으면 지루하지.
죽과 면도 종종 상에 올랐다.
여름에는 녹두죽, 아욱죽, 닭죽.
겨울에는 팥죽.
아플 때는 흰 죽, 깨죽, 잣죽, 쉽게 만드는 계란죽.
채소와 소고기 다진 것을 넣고 푹 끓인 야채죽.
콩나물밥이 싫증 나면 콩나물 죽.
힘내라 전복죽, 새우죽...
죽은 보온 도시락에 넣어 학교에도 가져갔고,
한 솥 끓여놓으면 식사 때만이 아니라 간식과 밤참으로도 잘 먹었다.
뿐인가.
밥으로도 간식으로도 잘 먹었던 떡국, 만둣국, 떡볶이, 물만두, 찐만두, 구운 만두도 있지.
국수도 한몫했다.
면 음식은 미리 재료를 준비해두었다가 식사 직전에 딱 먹을 만큼만 금방 끓여내야 한다.
호박 채 썰어 넣은 칼국수.
해산물 육수에 양념한 소고기를 넣는 수제비. 고소한 콩국수.
멸치 육수에 고명도 화려한 잔치국수.
여름엔 물냉면, 비빔냉면, 비빔국수. 명절에는 온면-함경도 식 녹말 국수 온면은 어머니 대표음식이다.
어머니가 즐겨 보시던 무거운 요리백과사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음식이 담겨 있었는데 전 세계 요리가 다 있었다.
샌드위치, 토스트, 스파게티, 햄버거. 라자냐는 아이들 밥상에 종종 올랐던 메뉴였다.
이렇게 다양하고 맛있는 밥상을 매 끼니 차려내니 식구들은 죄다 집밥 마니아였다.
집이 편안하고, 항상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식구들은 집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먹는 것만으로도 어머니 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때 우리 집 살림을 도와주던 언니들, 아주머니들, 지금 돌아보니 일이 얼마나 고됐을지, 미안한 마음이다.
어머니께서 암이 전이된 것을 확인하기 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증상은
통증 외에 치아 문제와 입맛 없음이다.
항암 이후 구강 상태 변화에 따라 몇 번 바꾼 의치가 또다시 맞지 않게 되었고
치아가 더 빠지고 잇몸이 아팠다.
다른 건강 문제로 보철도 할 수 없는 형편.
그전까지 여러 병을 앓고 계심에도 식욕은 놓치지 않아 식사는 잘하셨는데.
급격히 식사 양이 줄고 잘 드시던 음식을 차려놔도 수저를 내려놓는 일이 잦아졌다.
부위를 특정할 수 없는 통증이 심해졌다.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그동안은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만 하면 잘 드셨는데 이젠 뭘 해도 안 드시니 애가 탔다.
여러 가지 죽을 끓이고.
국이나 찌개도 다양하게 만들어보고.
반찬도 이것저것 했지만 그래도 안 드시니. 아, 이젠 다른 식단이 필요한 거로구나, 싶었다.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주로 소고기로 끓인 국물에 생선이나 새우 같은 해산물 반찬 조금.
7분 도미와 찹쌀로 끓인 걸쭉한 흰 죽- 이 기본 밥상이 되었다.
맑은 소고기 뭇국, 육개장, 시래깃국, 닭개장, 김치찌개, 감잣국, 된장국, 매운탕, 알탕, 명란찌개, 고추장찌개.
국물 음식은 재료와 양념에 변화를 주고.
옥도미, 조기, 광어, 갈치, 대구, 명태, 연어, 새우, 게.
해산물 재료를 역시 조리법과 양념을 바꾸어가면서 밥상을 차린다.
하지만 번번이 똑같은 건 못 참는 식성이라 식단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잇몸에 부담이 덜 가는 푹 무르게 익힌 물만두.
죽과 국물만 드시는 삼계탕.
집에서 체에 걸러 끓이는 팥죽.
아주 질게 지은 팥밥.
감자를 갈아 지지는 감자전.
역시 떡이 풀어지도록 푹 끓인 떡볶이나 떡국.
그리고 내가 몇 년 전 알게 된 가지밥 같은 음식이 별식이 된다.
어머니는 워낙 가지를 좋아하셨다.
가지를 갈라 고기와 채소를 고명으로 넣어 고추장을 비롯한 갖은양념을 하는 가지찜. 이것을 고등어와 함께 푹 지지는 고등어 가지찜을 만들거나.
생가지를 길게 갈라 쪄서 새콤달콤, 고소하게 무친 가지나물을 즐겨하셨다.
하지만 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되도록 피하는 데다 기껏 만들어도 어머니 맛이 안 나니.
그냥 도톰하게 잘라 올리브유에 굽거나 가늘게 잘라 쪄서 양념장에 찍어 드시도록 한다.
(어머니의 불만족한 표정엔 눈 질끈 감고)
그런데 쉽게 만들 수 있는 가지밥을 어머니가 맛있어 하시니.
특히 가지가 많이 나는 여름 저녁에 즐겨하는 메뉴가 되었다.
* 치아가 좋지 않은 어머니를 위한 가지밥
1) 불린 쌀을 들기름에 달달 볶는다.
2) 껍질을 벗겨(환자의 소화와 치아 문제로 껍질을 벗긴다) 얇게 자른 가지와 잘게 다진 양파를 얹어 밥을 한다.
3) 기름기 없는 다진 소고기, 잘게 다진 매운 고추에, 간장과 설탕 조금.
파, 마늘, 술로 약하게 양념을 해서 밥이 끓기 시작하면 밥 위에 얹는다.
4) 파, 마늘, 고추- 잘게 썰고, 간장, 설탕, 식초, 참기름, 볶은 깨, 청주
(입맛에 따라 고춧가루를 넣기도)을 잘 섞은 양념장을 만든다.
5) 밥이 끓는 동안 중간중간 뜨거운 물을 보충하며 재료를 잘 섞어 질고 무른 밥이 되도록 충분히 익힌다.
6) 뜸이 들면 그릇에 담아 양념장을 골고루 비벼 먹는다.
가지밥에 명란젓 구운 것과 소고기 뭇국으로 밥상을 차렸다.
오늘도 어머니는 가지밥을 달게 드셨는데. 그래도 한동안 가지밥은 메뉴에서 빼야겠다.
아껴야 하거든.
잘 드신다고 자주 했다가는 가지밥마저 싫증 내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