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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Mar 25. 2021

여전히 이방인

활자로 만난 인물들

[이민자들], W. G. 제발트, 이재영 옮김, 창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다.

글이, 단순히 문장만이 아니라, 글이 갖는 정신세계가 상당히 세련되었다는 느낌.

2001년,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더는 작품을 접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작가는 1944년 독일 남부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노리치정착했다.

주로 20세기 전반기의 영국, 독일,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민자들],

1992년 발표되어 작가의 입지를 굳힌 작품이다.

이국에서 살아가는 화자와,

화자와 일정한 관련을 갖고 있는 각각 다른 이방인의 삶을 둘러싼, 네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 전반에 걸쳐 나치의 핍박으로 생활 터전을 떠나야 했던 고통스러운 유대인들의 상황이 짙게 배어있다.

젊은 시절에 독일을 떠나 도착한 미국서 생계 기반은 마련했지만,

고향에 다니러 올 때마다 와서 삼 주일, 다시 떠날 슬픔으로  삼 주일을 줄곧 울며 지내던 테레스 이모처럼.

이민자들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세계와의 거리감을 마음 깊숙이 지니게 된다.



작가의 소설들은 사실과 허구, 거기에 사진까지 더해서 마치 논픽션인 듯이 보인다.

서술 매우 구체적이면서 환상적이어서

장소와 인물들의 행동을 세세히 그려내면서 바랜 색감으로 우수에 찬 분위기이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른바 '그들의 벨 에포크' 시대, 

화려하지만 어두운 흑백 영화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갈 것이다.


집사와 함께 동방을 유랑하 상류사회의 엇나간 아들이라든가.

바이마르 시대에 살 길을 찾아 집을 떠나열세 살 소년.

캔버스의 물감을 지워가는 화가.

심한 아픔을 마음에 품은 열성적인 교사라든가 

황폐해진 정원에 놓인 오두막에서 거처하는 노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이방인으로서 타향에서 늙어간다.

작가의 글들은 굳이 의미를 찾으려 들지 않아도,

단순히 읽는 행위만으로도 재미있다.

비록 훌륭한 번역은 아니지만.



어릴 때 부모 손에 이끌려서,

혹은 악마의 손아귀에서 목숨을 지키려 고향을 떠난다.

또는 다섯 살부터 일을 해야 했던 소년은 홀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다.


반기는 이 없는 낯선 세계를 찾아온 이방인으로서,

이들은  땅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들의 예법을 더 철저하게 몸에 익히고,

군에 입대하고,

교육과정은 최우등으로 이수하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새로 견진성사를 받는 심정으로 내 이름을 헤르슈에서 헨리로, 성을 쎄베린에서 쎌윈으로 바꾸었지요.(32쪽)


그렇게 적극적으로 몸부림치고,

능력도 인정받았지만.

어느 시점에서 인물들은 세상과의 교섭을 탁 놓아버린다.


.... 나는 소위 현실세계와의 마지막 접촉마저 끊어버렸습니다. 그 뒤론 그저 식물과 동물들만이 거의 유일한 대화 상대지요. 이것들과는 그럭저럭 사이가 좋습니다.(33쪽)


그리고 이렇게 홀로 황량한 환경에 놓인다.


... 다른 곳들도 대개 그렇듯이 이젠 테니스장도 황폐해졌습니다. 그는 상당히 파손된 빅토리아 양식의 온실과 멋대로 자라난 나무 울타리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몇 년 동안 돌보지 않았더니 채마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부담을 많이 줬던 자연도 그냥 저렇게 방치해두었더니 신음 소리를 내며 점점 함몰되는 중입니다.....(14쪽)



이민자들은 최선을 다해 어느 정도 성공도 얻었지만.

이미 산업혁명기에는 산업을 이끌고,

전쟁기에는 아일랜드와 독일, 유대인 이민자들로 붐볐다가 몰락해버린 영국 맨체스터처럼...

늙은 이방인의 마음은 늦은 가을,

음울한 비가 쓸쓸하게 내린다.

1966년, 화자의 눈에 비친 맨체스터의 풍경은 이랬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나마 얻고자 시내로 걸어가서, 19세기에 지어진 이래 오랜 세월을 거치며 새카맣게 변한 거대한 건물들 사이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텅 빈 거리와 광장에 겨울 햇살이 쏟아지는 날은 지극히 드물었는데, 그렇게 화창한 날이면 한때는 전세게로 확산된 산업화의 발상지였지만 어느덧 무연탄 색으로 시커멓게 덮여버린 도시가 그 만성적인 가난과 몰락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바람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197쪽)



1969년 맨체스터를 떠났던 화자가 1989년 11월 말, 다시 방문했을 때.


이른 오후에 맨체스터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도시를 가로질러 항구가 있는 서쪽을 향해 갔다. 길을 찾기가 뜻밖에도 너무 쉬웠다. 맨체스터는 거의 사반세기 전의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전반적인 몰락을 막기 위해 지어 놓은 건물들 자체가 다시 퇴락하는 중이었고, 이른바 개발구역이라는 곳들도 반쯤은 포기한 듯 보였다.....  기껏해야 반만 사용되거나 채 완공되지도 못한 사무실 건물들 전면의 번쩍거리는 유리창에 주변의 잡석 많은 땅과 아일랜드  호수에서 몰려오는 하얀 구름들이 비치고 있었다.(227쪽)



반드시 이방인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세상에 밀착되어 산다는 건 쉽지 않지.

 색깔과 강도에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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