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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Mar 29. 2021

무너져가는 것들

활자로 만난 인물들

[토성의 고리], W.G. 제발트, 이재영 옮김, 창비



제발트 소설 하나 더.


이 소설은 바로 전에 읽은 [이민자들] 다음 작품으로, 1995년에 발간되었다.

화자의 도보여행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장소의 축이 되는데.

작가가 [이민자들]을 쓰기 위해 현장을 취재했던 여행도 인용되어 있어서,

철저 작가의 작업 과정을 상상할 수 .


작가는 이 시대의 문명.

그러니까,

한때 크게 일으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증거로 거대하고 사치한 도시 또는 건축물을 세우지만.

부유함이 사라지면 도시는 쇠락한다.

점점 무너져가고 는 영국 동부 해안 지역을 돌아보면서.

작가는 강대국이 저지른 크나큰 죄악이 어른거리는 현대사를 얘기다.


작가는 계획이 있었던 거야.

생전에 발표한 네 의 소설은,

작가가 그리려 했을 인류 단위 세계를 통찰하, 단지 시작이었뿐인데.



화자 1992년 8월, 영국 동부 써퍽도보 여행을 떠난다.

영광은 떠나가하염없이 몰락하고 지역이다.

독성이 흘러들어 오염된 바다로 어부들은 사라졌.

산업이 무너져 인구는 줄었다.

화자는 고적하고 인적 없는 지역을 며칠걸으면서 장소와 관련된 인물들을 떠올린다.

이를테면,


오늘날 써머레이턴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저택은 더 이상 동양의 동화 속 궁전 같은 인상을 주지 않는다. 유리로 에워싼 산책로와 한때 밤을 환하게 비춰주던 종려나무 온실의 높다란 궁륭은 이미 1913년에 가스폭발로 불타오른 뒤 철거되었고. 온갖 것을 손질하고 관리하던 하인, 집사, 마부, 운전사, 정원사, 요리사, 바느질하는 하녀, 시녀들이 해고된 지도 오래되었다. (47쪽)


자수성가로 이룬 막대한 재물표상 듯,

엄청난 재화를 쏟아부은 호화로운 성채였다.

'서서히 해체되어가면서 적요한 폐허에 가까워지는 현재의 써머레이턴'(49쪽) 저택에서,

화자는 재물 무상함은 보았을까.



바닷물은 무심하게 밀려들어오고

눅눅한 습지에는 풀들이 무성하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아왔던 흔적이 남아 있고, 

얽힌 사연들이 있다.

소설 속에는 여러 장소와 그만큼의 관련 인물들이 줄줄등장하는데.

작가 콘래드와 영국 외교관이었던 로저 케이스먼트는 이런 연유로 소설에 등장하게 된다.


싸우스월드에 도착한 이튿날 저녁, BBC는 마지막 뉴스가 끝난 뒤에 당시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1916년 런던의 감옥에서 반역죄로 처형당한 로저 케이스먼트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124쪽)



온갖 사치품으로 채워진 써머레이턴 저택이 불빛을 환하게 밝히며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불러들일 즈음에.

작가 조지프 콘래드는 폴란드 지방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폴란드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러시아 북서부, 황량한 곳으유배를 가게 되었고.

아내와 어린 콘래드는 유형지에 따라간.

모든 것이 썩고 문드러져가는 곳.

계절이라고는 하얀 겨울과 초록 겨울만 있는 곳으로.


...  서른둘의 에벨리나 코르제니오프스카는 결핵이 그녀의 몸속에 펼쳐놓은 그늘과,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은 향수 때문에 유형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생존 의지도 거의 다 소진되고 만다.....  기껏해야 빅또르 위고의 《바다의 노동자》 번역 원고를 들여다보며 여기저기 몇 줄 손보는 게 전부다. 이 지독하게 지루한 책이 그에게는 마치 그 자신의 삶의 거울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콘래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건 고향 상실자, 추방당하고 실종된 개인, 운명으로부터  지워진 사람, 고독하고, 기피당한 사람들에 관한 책이야. (129, 130쪽)



유형에서 풀려난 아버지와 크라크푸에 머물던 소년은 열두 살에 아버지까지 여의고.

외삼촌의 도움으로 성장해서는,

엉뚱하게(출신 집안으로 볼 때) 선원이 되겠다고 한다.

바다에서 몇 년, 마침내 선장이 되어 배를 인수받기 위해 오랫동안 염원해온 콩고로 갔으나.


이곳의 모든 것이 싫습니다. 사람들도, 사물들도 모두 싫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싫군요. 아프리카 상인들과 상아 거래업자들은 비열한 본능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 온 것이 후회되는군요. 그것도 아주 비통하게 (146쪽),

라는 편지를 외숙모에게 보내게 된다.


사정은 이러했다.


1885년 콩고 자유국 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된 레오폴드는 이미 이때부터 누구 앞에서도 책임을 질 의무가 없는 단독 지배자로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강 유역 100만  제곱마일을 포괄하는, 다시 말해 모국보다 면적이 백배나 큰 영토를 마음대로 통치하고, 이 땅의 무한한 자원을 가차 없이 착취하기 시작한다. 착취의 도구는 콩고 상업 주식회사와 같은 무역회사들인데, 이 회사가 오래지 않아 획득한 전설적인 이득은 모든 주주와 콩고에서 활동한 모든 유럽인에 의해 승인된 강제노동체계와 노예 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143쪽)



 사악함을 목격한 사람이 한둘일까.

모두가 주동자들처럼 잔인무도하지만은 않았겠지.

그러나 누구도 나서서 "이것은 잘못이요!" 외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로저 케이스먼트 말고는.


....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가 케이스먼트를 콩고에서 만났으며, 열대기후 탓에 그리고 그들 자신의 욕심과 탐욕 탓에 타락해가는 유럽인들 가운데 오직 그만을 올곧은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이 프로그램 첫 부분에 언급되었다.(125쪽)


1903년, 영국 영사 로저 케이스먼트는,

콩고가 개발되면서 토착민들에게 저질러진 죄의 종류와 규모에 대한 최초의 보고(153쪽) 함으로써.

무임금으로, 형편없는 식사에, 서로 사슬로 묶인 채 실신할 때까지 중노동에 시달리는 콩고 사람들의 실태를 일반인들이 알 수 있게 했다.



겉으로 영국은 로저 케이스먼트의 용기를 칭찬하는 듯했지만.

당국은 벨기에의 이익에 반하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그를 회유하려 든다.

 라틴아메리카로 보내지고,

라틴아메리카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영국 회사에 의해 저질러지는 잔인한 착취.

더해서 아일랜드 문제까지 부딪치면서 결국 그는 권력의 본성과 근원,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인구의 거의 절반이 크롬웰의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 그 뒤에는 수천 명의 남자와 여자가 백인 노예가 되어 서인도제도로 보내졌다는 것, 백만 명이 넘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머지않은 과거에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 새롭게 자라나는 세대들이 여전히 고향을 등지고 이민을 떠나도록 강요받고 있다는 것,...(156쪽)

 


불의를 알게 된 이상 타협할 수 없었던 케이스먼트는 결국 반역죄로 처형을 당했고.

제국주의는 두 번의 처참한 세계대전으로 사라질 때까지 버틴다.

체제가 붕괴되면서 거기에 탑승했던 많은 부자들이 파산했다.

그래도 재물은 남았지.

화자가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사람,

인도네시아 사탕수수 대농원에서 태어나 평생 설탕 관련 일을 하는, 네덜란드 사람 더용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거래를 독점하던 소수의 가문들은 엄청난 이익을 거두었지만, 그렇게 쌓인 부를 뚜렷하게 과시할 방법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화려한 별장과 도시 저택을 건축하고 장식하며 유지하는 데 상당한 재산을 썼다. 덴하흐의 마우리츠하위스나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과 같은 주요한 미술관이 설탕 가문의 기부금으로 세워졌거나 여타의 다른 방식으로 설탕업과 관련이 있다...

18세기와 19세기에 다양한 형태의 노예 경제를 통해 축적된 자본은 지금도 여전히 회전되면서 이자를 낳고 이자는 또 이자를 낳고, 늘어나고 몇 배로 불어나면서 자신의 동력을 얻어 계속해서 새로운 열매를 맺고 있다...

예로부터 이런 돈을 정당화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 바로 예술을 후원하고, 예술작품을 구매하고 전시하며, 큰 경매시장에서 작품 가격을 거의 우스울 만큼 계속해서 높이 올리는 데 있다는 것이 더용의 생각이었다.(227쪽)



현실을 직시하면 우울해진다.

인과응보를 역사에 대입하려면 비관주의자가 되기 쉽다.

우주의 차원에서 한 인생은 티끌이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한 번뿐이며,

단숨에 불타오르기에는,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진다.

떳떳한 비극으로 끝낼 것이냐.

성공이라는 빛나는 훈장을 걸기 위해 잔혹하고 비굴하게라도 살아남을 것이냐.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선택은 자신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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