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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May 06. 2021

돈을 위해 산다!

활자로 만난 인물들

[중세 유럽의 상인들, 무법자에서 지식인으로],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씀, 김위선 옮김, 도서출판 길



192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역사학자인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는,

역사에서 '미시사'라는 분야가 생기기 전에 이미 미시사적 연구방법을 사용했다.

'...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맥락의 논제를 얘기하고자 항상 그는 한 사건이나 한 인물 혹은 소재 하나를 선택하여 이를 현미경으로 삼고 그 주변에 묻어나는 여러 요소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미시적 방법'을 택했다.(17쪽)

이전에 우리가 읽은 로렐 대처 울리히의 [산파 일기]도 미시사 연구 사례이다.


옮긴이는 저자 치폴라가 '역사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알고 이해한 역사가'(18쪽)라며,

"과거에 살아 숨 쉬던 인간의 삶을 사료에 근거해 재구축하는 것이다"(18쪽)는 저자의 말을 소개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수백 년에 이르는 시대와 국적을 달리하는 서유럽 상인들의 활동을 소개하면서,

서구의 상업과 경제 발달과정 일부를 보여준다.



오랫동안 상업은 인간사의 변방에 있었다.

중세시대 초기에도 상인은,

'이동성이나 변화가 전무하던 세상, 다시 말해 모두라고 하기에는 좀 과장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땅 몇 마지기에 들러붙어 각자의 영주를 섬기며 살던 세계에서 상인은 일탈한 개체, 그릇된 존재였고 조국도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의 대명사였다.'(46쪽) 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돈밖에 모르며 물질적 이익만 좇는다'(46쪽)면서 상인들을 비판했다.

상인들은 물건을 팔기 위해 봇짐을 메고 험하고 먼길을 다니는 위험을 무릅써야 했고.

도적질도 거절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모진 삶을 살았다고 한다.


11세기에 들어와 이른바 '상업 혁명'이라 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물건을 고 이동하던 상인들이 주요 도시에 거점을 마련해두고 물건만 움직이게 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중북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 독일 한자동맹에 속했던 많은 도시 그리고 카탈루냐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새로 생겨난 눈에 띄는 중요한 사회변화는 바로 상인 계층의 등장이었다. 장원 경제체제에서는 가장 천한 신분으로 간주되었던 상인이 이제는 상류 계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인은 방금 언급한 지역에 위치한 수많은 도시의 경제를 꽃피우고 번성시켜 그 도시의 주인이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도시를 제외한 나머지 서유럽 지역에서는 이러한 사회변화가 완만하게 일어났으며 유럽 대륙 이외의 지역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48,49쪽)


일가가 모여 살면서 상인 가문은 대를 이어 가업에 종사했는데.

이익에만 충실했던 이들 가문들은,

권력과 결탁 또는 권력을 장악하여 불법, 탈법을 자행하고.

무참하게 경쟁자를 제거했으며.

폭력까지 불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하려 했던 '지독한 악당'(71쪽)들이었다.

불법을 저지르다 발각되면 허드레 일을 하던 심부름꾼들만 처형을 당하고.

주범인 권력은 빠져나갈 뿐 아니라 머지않아 권력에 컴백하는 쓰디쓴 인간사.



인간 세상에서는 종종 어이없는 열풍이 불곤 한다.

지나고 보면 귀신에 씌었나, 싶지만.

열풍에 휩쓸린 당시에는 그것에 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욕망을 느끼나 보다.


1656년을 기점으로 해서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프랑스 화폐에 대한 열풍이 터키에서 일었다. 예를 들면, 모든 여성은 루이지노 화폐가 달린 귀걸이를 가지고 싶어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루이지노 화폐로 된 목걸이나 팔찌도 원했다. 심지어는 머리빗에도 루이지노 화폐를 갖다 달았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 있는 여성은 이 동전을 옷에까지 매달아 장식하였다. 갑자기 루이지노 화폐를 너도나도 다투어 찾게 되자 환전 가치가 껑충 뛰었다....

이제 루이지노 화폐는 상품 교환을 위한 매개물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이 되었고 더욱이 이 상품에 대한 수요는 아주 컸다.(102쪽)


수익 거리 눈에 띄니 어떤 일이 생겼을까?

조폐권을 갖고 있던 귀족들은 돈을 받고 권리를 팔았고.

돈벌이에 기가 막힌 제노바 상인들이 제멋대로 순도가 낮은 불량한 동전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많은 가짜 루이지노 화폐는 터키로 밀수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밀수 사업에 이해관계를 같이 했던 당국의 콜라보까지 더해서.

한몫 잡으려는 불량화폐 투기사업은 쉽게 종식되지 않았다.


결과는 뻔하다.

불량화폐 문제는 여러 국가들이 관련된 국제 문제로 번지게 되었고,

시장은 혼란에 빠졌다.

터키의 경제 위기는 악화되어 먹고 살기 힘들어진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시민들의 불안과 고통이 극에 달했다.



저자는 40년 이상 역사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고 한다.


인간은 직접 경험을 하고 나서도 바뀌는 것이 하나 없으며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것을 보고서도 전혀 배우질 못한다. 그래서 본디 타고난 고집대로 행동해 똑같은 실수와 똑같은 잘못을 계속해서 저질러 인간 사회의 발전에는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58쪽)는 것이다.


결국 '인생은 고해'라면서 어리석은 행태를 반복하는 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책은 얇고 서술은 재미있다.

부담 없이 읽으면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허상인가, 하는.

제법 깊이 있는 상념에 잠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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