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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Jun 12. 2021

여행, 아니 인생은 악전고투

활자로 만난 인물들

[아빠, 우리 언제 집에 가요?],  벤 해치 지음,

이주혜 옮김, 김영사



영국을 동서남북 둘러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물론 내가 돌아보고 싶은 영국만은 아니다.

지구 어디라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없지.


도서관에서 영국 여행서려니, 하고 집어 든 책이었다.

영국의 가족여행 가이드북을 의뢰받은  소설가와 여행 담당 기자인 부부는,

"매일 밤 다른 호텔에서 자고 매일 아침 다시 짐을 꾸려 떠나면서 하루에 네다섯 군데 명소를 둘러"(17쪽) 보는,

다섯 달, 8,000마일 여정을 떠난다.

숙박과 비용은 대부분 협찬으로 충당하고.

살던 집은 민박 운영사에 빌려주었다.

네 살, 두 살 두 아이를 데리고, 작은 자동차에 짐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주변 사람들 염려를 잔뜩 받으면서...


두툼한 책에서 저자는 익살을 쏟아내지만 그 유머 코드는 나와 맞지 않았다.

또 책은 여행서라기보다 여행 가이드북을 쓰기 위해 다녀온 여행에서 자신이 겪었던 개인적인 감상이었다.

그만 읽을까, 는데.

읽다 보니 여행지이든 사무실이든 공장이든,

아이를 키우고, 돈벌이를 하며, 사람들과 얽혀서 살아가는 인생의 무게는 우리가 살아가는 한 결코 벗어던질 수 없겠더라.

이 책은 그 고군분투의 기록이다.



출발 직전 인생의 나침반이셨던 든든한 아버지는 말기암을 선고받았다.

어린 두 아이들을 데리고 부부는 빡빡한 일정을 숙제처럼 해내야 했지.

숙박을 제공받고 입장료를 협찬받는 일이 쉬울 리가.

낯선 곳에서는 종종 길을 놓친다.

아이는 다치고,

저자는 병원에 입원하며.

피로에 지치고 부하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부부는 서로를 탓하며 말다툼을 한다.

함께 기자 교육을 받았던 옛 친구가 CNN의 비중 있는 기자가 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하는 모습을 뉴스에서 본다.

내 현실은 이런데 말입니다.


100마일을 가는 동안 두 녀석이 번갈아 광기를 부리며 뭔가를 달라고 칭얼댔다. 바나나 달라, 시리얼바 달라, 장난감 달라, 사탕 달라, 안아달라, 단 것 달라 등등. 콜러 퍼드 Chollerford에 도착했을 때는 신물이 난 피비가 찰리의 운전 놀이 장난감의 시동 버튼을 고장 난 상어 눈으로 계속 누르고 있었다. 운전석 사이드포켓에서 반쯤 녹은 초콜릿을 찾아 쥐여주자 비로소 유일한 휴식이 찾아왔다. 마침내 피비가 잠들자 한숨 잘 자고 일어난 찰리가 바통을 이어받더니 왜 아직 카시트에 앉아 있는 거냐고, 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냐며 짜증을 부렸다.....(301쪽)



처음부터 이런 삶을 꿈꾸었던 건 아니었다.

어느 한 발짝도 쉽게 내디디지 않았는데 여기에 이르고 말았네.

힘들다고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형편.


20대 시절에는 여자를 만날 때마다 그녀와 함께 캠핑카를 타고 달아나는 게 꿈이었다. 늘 되풀이한 환상이었고 낭만적 자유에 관해 내가 품은 이미지였다. 현실적 삶- 사랑하고 정착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에 다니는-은 어쩐지 충분해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조금 더 고상한 뭔가를 원했다. 한때 현실세계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이 충동을 무인도 감정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여자와 달아나 하루 종일 그녀와 캠핑카 안에 있고 싶었다. 상상 속의 우리는 히피 음악을 듣고 차를 몰았다.....(327,328쪽)


장기여행은 고립감도 준다.

자신들이 세상에서 동떨어진 느낌이 든다.

종종 친구들을 만나고 병세가 악화되는 아버지와는 매일 통화하고 틈을 내어 찾아뵙는데도.


이야기를 나눌수록 우리도 모르게 일종의 평행 우주에 갇혀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여전히 영국에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일상을 보내고  신문기사를 읽고 텔레비전에 비친 것을 보는 그 영국과는 다른 영국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비눗방울 속에 갇혀  살고 있었다.....  오로지 아이들을 데려갈 만한 명소와 시내 중심가의 국영 주차장괴 호텔 그리고 아동 친화적인 레스토랑만으로 구성된 가상의 영국만 존재했다. (352쪽)


그럼에도 가끔 여행을 왔구나!, 감동을 받는 순간은 있지.


우리는 북쪽으로 향해 글래스고와 에든버러를 지나쳐 트로서크스를 탐험했다. 화창한 날 스코틀랜드 고지 한가운데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본 적이 없다.  며칠 동안 우리가 지나간 도로 옆에는 어김없이 수정처럼 맑은 호수에 나무가 가득한 산등성이가 비치는, 숨이 멎을 듯 빼어난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124쬭)



아버지는 돌아가신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고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중단됐던 여행은 다시 진행된다.


"전 아버지의 골칫덩어리였죠. 아버지가 해주신 최고의 충고는 딱 두 부류의 사람들 말만 믿으라는 거였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본 사람들."(423쪽)


힘들었던 일정을 마치고 계획대로 책을 낸다.

비슷한 책이 몇 권 더 나온 걸 보니 이 가족은 몇 번 더 이런 여행을 했나 보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협력이 잘 되는 부부였다.

좋은 동반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참 소중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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