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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Jun 20. 2021

가지려 들지 않는다.

활자로 만난 인물들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 이토야마 아키코 지음,

권남희 옮김, 작가정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한때 일본 작가들이 우리나라에서 인기 폭발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 경제의 버블은 끝났지만 여파는 남아 있어서

우리에게 당시 일본 문화는 여전히 세련되고 생활은 풍족해 보였던 시기였다.

이토야마 아키코의 소설들도 한국어로 계속 번역되었고 작가가 우리나라를 방문도 했었다.

작가의 초기작들이 내 맘에 들었었는데.

사랑이라는 관계에 대해서 꼭 소유하려 들지 않고.

서로에 대한 좋은 마음을, 좋게 지켜내려는 작가의 뜻이 보였었다.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와 [오다기리 다카시의 변명]은 

각각의 단편소설이지만.

두 소설은 하나의 관계를 남자 입장과 여자 입장에서 설명하것이므로,

하나의 소설봐도 무방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소설 속 여러 구절을 베껴놓은 오래된 파일을 찾았는데. 책에 관해서도, 옮겨 쓴 내용의 쪽 번호표시하지 않았더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너무 더움.

다음에 보충하기로 내 맘대로 결정합니다.)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로 표시합니다.



선배에게 반했다.

학교에서 인기 최고인 좀 건방져 보이는 사람.

이런 단계로 둘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신을 처음 본 곳은, 학교가 아닌 신주쿠 쇼와칸 옆의 어둠침침한 재즈바 '엑시트 뮤직'이었다. 흑갈색의 찌든 공기가 떠도는 가게에는 짙은 색의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두 줄로 늘어서 있고, 안쪽에 카운터가 있었다. 벽 선반에는 레코드가 빽빽이 꽂혀 있다. 단골 아저씨들이 재즈 토론을 하러 들르는 것은 밤 아홉 시 무렵부터였기 때문에 개점 후 네 시간은 우리들의 낙원이었다. 우리는 고등학생인 주제에 당당하게 맥주를 마셨다.}


{친구와 이야기하다 문득 돌아보니 당신이 안쪽 카운터 가까운 의자에 앉아 찌를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화살처럼 꽂힌 그 눈길에서 벗어나려고, 옆을 보기도 하고, 함께 있던 친구와 눈을 마주치기도 하고, 담배로 연기를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당신의 시선은 줄곧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친구는, 오다기리 다카시,라고 말했다. 그 이름이라면 일학년인 나도 알고 있었다. 이 학년인 그는 성적이 좋고 여자 친구도 있으면서 소프랜드를 다니는 사람,이었다. 거짓말, 불결해! 우리들은 그 소문에 그렇게 반응했다.}


{그 후로는 당신을 찾는 것이 학교에 가는 목적이 되었다. 하지만 당신은 학교에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도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뒤로하고 당신을 찾으러 나갔다......  나는 시내에서 까마귀처럼 자유로웠다. 어디를 가든 최단 거리와 최단 시간의 코스를 알고 있었다. 어떤 인파 속에서도 누구에게도 부딪치지 않고 추월해 갈 수 있었다. 어느 가게에 어떤 물건이 들어왔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자주 들르는 디스크 유니온에서 시작해 세카이토, 롤링스톤, 마루이 백화점, 기노쿠니야 서점, 악기점 몇 군데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마지막으로 엑시트 뮤직에 도착하면, 당신은 거의 언제나 카운터 옆자리에 앉아 하드커버의 책을 편 채 담배 연기를 천천히 토하고 있었다.}



제멋대로이고 반항적이지만 잘 생기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

모두의 시선과 선망을 받던 고교시절을 벗어나자 그의 진로는 꼬인다.

대학은 자꾸 떨어졌고.

서른세 살에 작가로 데뷔는 했지만 소설을 발표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여자는 철커덕 대학에 붙어버렸고 졸업 뒤에는 대기업에 들어갔다.


{무슨 일 해요, 하고 묻자, 작가야, 하고 대답했다. 아직 한 번도 팔린 적 없는 작가, 아르바이트로 먹고살고 있지만, 매일 쓰고 있어.}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긴 시간 그의 응답을 기다린다.

남자는 여자를 시선에서 놓지 않지만 그렇다고 붙드는 건 아니다.

판 짓자! 들면 이나마도 끝날 것 같고.

대로 견디기엔 숨이 막힌다.


{문제는 결혼 따위가 아니라, 이 어중간한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였다. 용변을 보고 뒤처리를 하지 않은 것처럼 지내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차라리 섹스를 하면 전부 끝나버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드라이하고 쿨한 당신의 이미지. 그런 당신의 부가가치는 섹스를 하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쿨해 보이지만 글을 써도 결과는 없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로 용돈이나 벌면서 어머니에게 얹혀사는 남자 속이 편할 리가.

여자의 질문에 남자의 대답은 이러하더라.


{"너와 인연을 끊을 생각은 없지만, 나는 정말 여러 가지 것들을 포기하고 있다. 이것으로 답이 될까."}


{도쿄로 돌아온 후 당신은 나를 '친구'라고 강조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성으로 사귀는 게 아니라서 점점 더 헤어질 수 없게 만드는 느낌이 들게 했다.}



힘들다.

벗어나고 싶다.

그렇다고 당신과의 인연을 끝내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려봤지만 용케도 그때마다 그는 내게 연락을 한다.

나쁜 X.

그런 어두운 터널을 지낸 뒤 여자는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임종을 봐주고, 내가 어머니의 임종을 봐주고. 내가 떠날 때는 누가 봐줄까."

"나요."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오사카에서든 홋카이도에서든 달려갈 것이다.}



사랑은 결혼으로 완성된다고들 한다.

결혼으로 서로 의지하며 평생을 함께 가는 것도 좋지.

하지만 결혼은 사랑과는 또 다른 상황이 아닐까.

결혼을 고집하지 않고 서로의 개별적인 인생을 각자 살아가면서,

서로 사랑할 수는 없을까?


{나는 문고본을 한 손에 들고 차를 마시면서 당신이 눈 뜨기를 기다리고 있다. 덮치거나 하지는 않는다. 조르지도 않는다. 당신을 막다른 골목 안쪽으로 몰아세우는 짓은 일체 하지 않는다.

조용한 마음이다.}



남자의 이름인  [오다기리 다카시의 변명]에는 남자의 입장이 소개된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한다.

     

{현실의 오다기리는 막다른 골목에서, 차 밑에 웅크린 고양이처럼 언짢은 얼굴로 세상을 엿보고 있으니까.}


{그가 데뷔했을 때, 모두들 그가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했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도 빛을 본 것만 같았지만, 일 년이 지나 보니 그는 역시 다른 맹장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엉거주춤한 상태로 지내야 하는가.

인정받지 못하면서 계속 글을 쓰려니 마음은 자꾸 위축된다.


{칭찬받고 싶다.

죽어도 말로 하진 못하지만, 나 역시 평가받고 싶다. 목에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놈들을 제일 싫어했기 때문에 취직도 하지 않았다. 삼수해서 대학에 들어갔을 때도 그 누구도 축하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이런 식이면 흔히 무책임하다, 이기적이다, 비난하던데.

이런 상태에서 결혼하면 또 염치없다, 대책 없다고 욕먹을 일이다.

남자로서는 여자를 붙잡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녀석, 언제까지 나와 만날 생각일까. 내 탓이 아니다. 나는 한 번도 옆에 있어달라고 한 적이 없다. 옆에 있어주겠다고 한 적도 없다. 불확실한 것은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 처지가 이러니까, 시간과 거리는 정할 수가 없다.}


여자는 마음을 정했다.

불확실한 혼란을 두 존재의 소중한 거리감으로 발전시켰다.


{엑시트 뮤직에서 카운터를 사이에 둔 거리, 그것이 그와의 바른 거리라고 생각했다. 떨어져도 안 되고, 붙어서도 안 된다. 소중한 기분이 언제나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처럼 놀고 있다. 딱 붙어서 질식시켜버리면 안 된다.

그리고 나코는 거리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두 남녀의 관계는 소설이기에 서로의 마음과 입장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다.

현실에서라면 서로는 서로의 마음을 정직하게 토로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무엇을 구할지 알지도 못하여 온갖 추측과 오해와 상상으로 마음에 상처만 받은 채 불쾌한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런 사랑도 괜찮지 않은가?

사랑하면 꼭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려야만 하는가?

결혼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과 상황도 있을 텐데.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마음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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