뿅뿅, 뿅뿅뿅뿅
아무도 모를 숫자들을 재빨리 누른다.
혹시 주변에 타인이 있다면 뒤통수에 안테나를 바짝 세우지.
찰칵.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다.
현관으로 몸을 집어넣고
짤깍, 문이 닫힌다.
아침이 되어 집을 나설 때까지 혼자이겠지.
사방을 둘러싼 튼튼한 벽으로 공간은 외부세계와 격리되었고.
나의 공간에는 나만이 있다.
나의 고요함을 오롯이 지켜내야지.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것이며.
내 마음은 간섭받지 않는다.
바깥의 먼지를 털어내고 음악을 튼다.
천천히 밥을 먹고 말끔하게 치운다.
몸을 씻고 방에 들어와 포근한 이불 속에 들어가면,
드디어 하루를 마쳤구나...
안도하면서도 아쉬운 기분.
의미 있는 뭔가를 했어야 하는데.
오늘도 간신히 일상만 꾸리다가 하루가 가버렸다.
하품을 하면서 팔을 쭈욱 뻗어 전등을 끈다.
별 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던 오늘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순간순간은 지루하지만 시간은 재빨리 달아나네.
집은 전쟁터의 참호라 할지.
핑핑, 화살이 날아다니고 포탄 맞은 성벽 돌더미가 무너져내리는 전장에서,
내 몸을 가릴 수 있는 곳.
시위를 당겨 상대를 겨냥하는 대신,
땅 밑으로 몸을 낮추고 가만히 웅크려 앉아.
숨을 고르거나.
두려움을 가라앉히거나.
주먹밥을 조금씩 뜯어먹거나.
쏟아지는 공포 속에서 꾸벅꾸벅 졸 수도 있겠지.
위험을 막아줄 수는 없지만 잠시 피할 수는 있다.
다시 기운을 차릴 때까지.
때로 나의 집은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겨우 비닐우산 하나쯤일 수도 있다.
어깨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물에 젖은 바지는 다리에 철썩 달라붙으니.
휙 내버리고 싶지만 이나마도 없으면
남의 집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비 그치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튼튼한 내 집은 금세 완성되지 않는다.
끝내 꿈으로 그칠 수도 있어.
온전한 나의 성을 이루지 못한 채,
어중간한 어디서 안전하고 행복한 내 집을 그리워만 할 수도 있지.
오래전에 남산 한옥마을에서 박영효의 집이던가.
안주인이 거처하는 안방에 들어서려면.
마당에서 댓돌을 밟고 마루에 올라,
창호지가 발린 방문을 양옆으로 밀고 들어가는 방을 지나서.
다시 닫힌 문을 밀고 이어지는 방으로 들어가,
다시 또 방문을 양쪽으로 열고 들어가는 구조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양쪽으로 미닫이문이 달린, 중첩된 여러 개의 방을 지나야 마지막으로 안방에 닿는 거였다.
그 방을 보면서 내가 외부세계와 만나는 구조와 닮았다, 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나의 영역에 유난스러워서.
남의 영역에 들어갈 마음도 없고.
누가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못 견뎌했다.
대개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해는 못 하더라도 맞춰는 주는데.
가끔 불쑥불쑥 나의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거나.
고개를 쭉 빼들고 기웃기웃, 툭툭 건드려대는 사람이 있다.
타고나기를 너와 나의 경계라는 감각이 없는 사람이 있더라.
나는 처음 마주치는 사람은 마당쯤에 세워놓고 나는 여전히 안방에 들어앉아 있거나.
안면이 익으면 내가 발걸음 하여 마당에 있는 누군가를 가만히 바라본다거나.
시간을 두고 믿을 만하다 싶어지면 댓돌을 딛고 마루에 오르시지요, 허한다거나.
마음이 통한다 싶어도 내방으로 누군가를 들이지는 않는다.
그곳은 내밀한 나만의 공간이니까.
앞방쯤에서 이만치 떨어져 앉아 다과상을 대접하며 깊숙한 내 자리는 홀로 지키겠지.
사춘기라던가, 중2병이라던가 하는 반항의 증상이
나만의 영역을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뜻이 아닐까.
아직 허약해서 자신의 영역에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시 누가 경계를 무너뜨릴까 봐 발작적으로 반응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가 자신이 지켜내야 할 영역인지,
어디에 너와 나의 경계를 그어야 할지 도통 모르기 때문에 이랬다 저랬다, 혼란하겠지.
누구에게나 홀로 들어앉아 안심하며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게 쏟아지는 자극들을 찬찬히 살피는 곳.
나를 뒤흔드는 비바람 속에서 마음을 가누고 자극을 걸려낼 수 있는 곳.
내 몸을 지킬 공간이 확보되어야 마음의 영역도 지켜지는 기분이다.
나의 방은, 나의 집은, 나를 지키고.
그 집은 내가 쏟아붓는 정성으로 완성된다.
어떻게 나의 집을 이룰 수 있을까.
나의 집은 단지 가격으로 매겨지는 부동산이 아니다.
나의 방, 나의 집은 나의 보금자리이고.
나의 안식처이며.
세상에서 나를 품어주는 공간,
그리하여 내가 딛고 일어나 세상에 나갈 수 있도록 나의 기반이 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