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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Aug 06. 2021

비엔나의 링 슈트라세

활자로 만난 인물들

[천재들의 붉은 노을],  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생각의 나무,



오래전에 유럽 여행 가서 두 달 동안 비엔나를 근거지로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여행자로서 다른 지역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겠지만,

비엔나에서는 내가 마치 시민이라도 된 듯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지.


비엔나는 한때 유럽을 휘둘렀던 합스부르크가의 수도였으니 도시는 웅장하고 위용이 있었다.

근대기 문화사에 비엔나는 독특한 지위를 갖는다.

특히 '세기말'이라든가 '벨 에포크' 시기에 비엔나에서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이 책은 19세기 말 비엔나에서 꽃 피운 문화의 흐름을 소개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자신이 속한 1930년 대 세대에 관해 짧게 소개하면서 선배 세대, 그러니까 19세기 말 비엔나의 

지식인들에게서 받은 영향을 언급한다.


즉 합리주의와 낭만주의, 개인주의와 사회주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같은 범주 말이다. 그런 범주는 폭이 너무 넓고 환원주의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럽 고급문화 생산자들이 삶을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울인 구체적 노력이 그 속에서 고유의 특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더 넓은 역사적 맥락과의 관련 위에서 분석될 수 있는 틀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20쪽)


다소 말이 길지만 계속 책을 인용하자.


세기말 시대의 비엔나는 그런 정치적 토대 위에서 여러 학과를 포괄하면서 이루어지는 과목 연구를 하기에 매우 유용했다. 그 도시의 지식인들은 여러 분야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유럽 문화계 전체에서 비엔나 ‘학파’-특히 심리학, 예술사, 음악 분야에서-라 불리게 되는 혁신을 차례차례 이루었다. 하지만 업적이 국제적으로 좀 늦게 인정된 분야 -예컨대 문학, 건축학, 회화, 정치-에서 그들은 완전히 혁명적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사회 내에서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인식된 전통의 전복적 변형과 비판적 개조에 가담했다. 당시 비엔나에서 ‘청년파(Die Jungen)'라는 단어는 여러 생활 영역에 확산되어 있는 혁신적 혁명가들을 지칭하는 일상 용어였다. 1870년대 정치학에서 고전적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에 반대하던 젊은 반항가 그룹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이 용어는 곧 문학에 등장했으며, 그다음에는 아르누보를 먼저 받아들이고 거기에 특별한 오스트리아적 성격을 부여한 화가와 건축가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프로이트의 도시에 있는 새로운 문화 제작자들은 거듭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일종의 집단적 오이디푸스적 반항이라는 용어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의 반항 대상에는 자기들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들이 물려받은 가부장적 문화의 권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폭넓은 전선을 형성하여 공격한 대상은 자신들을 길러낸 고전적 주류 자유주의 체제의 가치였다. 자유주의적- 합리적 유산에 대한 그들의 비판이 이 문화적 활동의 여러 분야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특정 과목에 국한된 내재적 접근방식으로는 그 현상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다. 문화를 만드는 이들의 사고와 가치가 전반적으로 돌연히 변화했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사회적 경험이 존재함을 시사하는 것이며 그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비엔나의 경우, 그런 경험은 고도로 집약된 정치적ㆍ사회적 발전이라는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자유주의적 중산계급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시기는 서구의 다른 곳보다 더 늦었지만, 심각한 위기에 빠져든 것은 더 빨랐다. 실질적인 입헌 정부가 지속된 기간은 아무리 길게 봐도 약 사십 년(1860~1900)이었다. 입헌 정부의 승리를 축하할 새도 없이 후퇴와 패배가 시작되었다.(28, 29쪽)


자유주의 이후 (post-liberal) 시대의 특징인 문화에서의 ‘현대성(modernity)'이라는 문제는 프랑스에서는 1848년 혁명의 후유증으로, 일종의 부르주아의 아방가르드적 자기비판으로 발생했고, 제2제국 때부터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이르기까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서서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현대적 운동이 나타난 것이 1890년대인데, 그 후 이십 년 만에 이미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에서는 새로운 고급문화가 마치 온실에서 자라듯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그 온실의 기를 공급하는 것은 정치적 위기였다. 어떤 시인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광분한 후진적 오스트리아는 “거물들의 예선 경기가 치러지는 작은 세계”가 되었다.(30쪽)



영국과 프랑스에서 왕권을 밀어내면서 부르주아적 자유의 기치정착되어가는 양상이 달랐는데.

오랫동안 절대왕권이 강력하게 지배했던 오스트리아는 뒤늦은 19세기 후반, 겨우 한 세대 남짓 기간 동안 입헌 정부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시절은 다시 과거로 되돌아갔다.


전통적 자유주의 문화의 중심에는 합리적 인간이 있다. 합리적 인간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배와 자기 자신에 대한 도덕적 통제를 통해 훌륭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20세기에 들어오자 합리적 인간은 그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지녔지만 더 위험하고 변덕스러운 존재인 심리적 인간에게 밀려났다. 이 신(新) 인간은 그저 합리적이기만 한 동물이 아니라 감정과 본능을 지닌 생물이다... 이 심리적 인간을 발견을 촉진한 것이 바로 정치적 좌절감이었다. 그 신인간의 등장이 바로 비엔나 자유주의 문화의 정치적 위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바로 내가 다루는 주제이다.(38, 39쪽)


이 패배에는 깊은 심리적 반향이 따랐다. 그것이 불러일으킨 분위기는 퇴폐적이라기보다는 무기력함이었다. 진보가 종말을 고한 것 같았다.(40쪽)


호프만슈탈은 예술에 더욱 열중하는 현상을 시민적 삶이 실패한 데서 오는 불안과 결부된 것으로 보았다.....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예술에 몰두하는 이들이 한 사회계급에서 고립된다는 뜻을 함축한다. 하지만 비엔나에서만은 그런 예술이 사실상 한 계급 전체의 충성을 요구했으며, 예술가도 그 가운데 포함되었다. 예술을 위한 사람은 행동의 삶을 대체하는 것이 되었다. 사실, 시민적 행동이 점점 더 쓸모가 없어질수록 예술은 거의 종교 수준으로 올라섰으며 영혼을 위한 음식이자 의미의 원천이 되었다.(43,44쪽)



1857년, 절대주의 체제가 입헌군주제로 바뀌고 자유주의자가 방향타를 쥐었다.

요새가 남아있고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는 후진적 도시 비엔나는,

자유주의의 가치를 표현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재구축된다.

지금 비엔나의 옛 모습을 감싸고 돌아가는 '링'은 이 짧은 자유와 합리성의 시기에 이루어졌다.


도시의 재설계가 달성할 수 있었던 실용적 목적은 표상이라는 상징적 기능에 확실하게 종속되었다. 유용성이 아니라 문화적 자기 선언이 슈트라세를 지배했다. 1860년대의 거대한 프로그램을 묘사하는 데 가장 흔히 사용된 개념은 “쇄신”이나 “재개발”이 아니라 “도시 이미지의 미화”였다.(67,68쪽)


링의 광대하고 연속적인 원형 공간에서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거대한 건물들이 어떤 곳에서는 무리 지어, 어떤 곳에서는 하나씩 따로 떨어져서 자리 잡고 있다. 그 건물들이 뭔가 서로 종속되거나 우월함의 관계에 놓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넓은 대로가 건물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물들이 각각 따로따로 대로를 바라보고 있다.(74쪽)


'프리트 융'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자유주의 시대에는 권력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부르주아들에게 넘어갔고, 이 권력이 가장 충만하고 순수한 생명을 얻어 구현된 분야가 바로 비엔나 개조이다.”(88쪽)



이 시기 자유주의는 새롭고 진보적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아니다.

이들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왕권과 귀족의 구체제에 항거했지만,

대중을 받아들일 의향까지는 없었다.

1900년 이들이 헤게모니를 놓치고 오스트리아가 다시 18세기 체제로 돌아간 원인는 이들이 도외시한 대중도 포함될 것이다.


클림트가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 현대 회화에서의 분리파 운동- 오스트리아에서의 아르누보-은 삶의 새로운 방향성에 대한 혼란스러운 추구를 시각적 형태로 나타낸 것이었다.(290쪽)


우리는 앞에서,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이 1873년의 경제 공황에서 시작되어 어떤 식으로 점점 더 강력해졌는지 살펴보았다. 그와 동시에 자유주의 사회 자체 내에서도 자유주의 오스트리아의 무능력에 대한 절망이나 혐오감의 신음소리와 뒤섞여 개혁을 호소하는 외침이 울려 나오고 있었다.

...

1890년대 중반에는 전통에 대한 반란이 드디어 예술과 건축으로까지 퍼졌다.... 젊은 비엔나 인들은 프랑스 인상파와 벨기에 자연주의자, 영국의 라파엘전파와 독일의 유겐트슈틸 등 예술적 선진국들을 바라보며 영감을 구했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 기반은 그 아버지들의 고전적인 사실주의 전통을 거부하고 현대 인간의 진짜 얼굴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294,295쪽)


그들이 제국의 전문직과 문화 분야에서 누리는 명성은 기본적으로 변함없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무능력해졌다. 따라서 비엔나의 상류 산계급은... 통치하지만 지배하지는 못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들 속에서 우월감과 무능력감이 기묘하게 뒤섞였다. 새로운 미학 운동의 산물에는 이런 요소들의 모호한 복합물이 반영되어 있다. (407쪽)



19세기 유럽은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

다른 대륙이나 약한 나라에는 한없이 잔인했고.

식민지로부터 참혹하게 끌어모은 재물은 물질과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물질적 바탕이 되었다.


모두가 그랬던 건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 안에는 지성을 갈망하고 문화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무엇이 참되고 옳은 것인가,

고뇌하고 논의하고 연구하며 실천하려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다.


정치 시즌이다.

열등감과 우월감이 기묘하게 뒤섞인 온갖 망상가들이 다 튀어나와 자신의 탐욕과 천박한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제발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하라고 외치고 싶다.

심리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기아와 궁핍에 시달리며 밥 한  그릇의 허기와 땅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고.

빈천한 내면과 손에 쥔 소유를 으스대일차원적인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 우리는 그토록 놀랍게 좋아졌음에도 정치판에서는 여전히 저렴한 인간들이 날뛰는 걸까?

왜!

우리 사회는 지성과 문화는 외면하고,

공공의 정의감은 짓밟으며.

여전히 이익과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날뛰는 것일까?

과연 마지막 발악일까?


자신의 이해관계의 틀을 깨고 세상 전체를 보는 넓은 시야를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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