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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Aug 01. 2021

할머니, 인생을 말씀하시다.

활자로 만난 인물들

[두근두근 우타코 씨], 다나베 세이코 지음,

권남희ㆍ이학선 옮김, 서울 여성신문사,



영화로 잘 알려진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원작 소설을 쓴 일본 작가 다나베 세이코는 1928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작가가 50대 후반에 들어선 1984년경에 발표된 소설 [두근두근 우타코 씨]는 일곱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졌는데 읽으면서 소리 내어 웃을 만큼 재미있다.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온 77세 할머니 우타코 여사가 주인공으로,

이 멋진 할머니는 삶의 무게가 갖는 의미를 조곤조곤 일러주면서,

세파를 헤치며 살아가는 자의 바람직한 태도를 상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우타코 여사는 전통적인 오사카의 부유한 도매상 집안에서 태어나 여학교를 마치고 역시 오사카의 부유한 도매상인 집안 후계자와 중매결혼했다.

별다른 애정은 없었지만 남편과 세 아들을 낳으며 순탄했던 인생은,

제2차 세계대전과 패망의 혼란기에 일본의 경제 기반이 무너지면서 위기를 겪는다.

파산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시부모는 넋이 나갔고,

부모 말만 따르던 남편은 갈팡질팡 정신을 못 차리는 형편.

어느 나라나 위기가 닥치면 당장 내 자식 입에 밥을 넣어야 하는 엄마들이 나서나 보다.

우타코 여사는 허드렛일부터 하여 생계를 이어가면서 억척스럽게 일해서 마침내 무너진 가업을 일으켰다.

5사옥까지 올려 안정권에 든 가업은 장남에게 물려주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고베의 고급 아파트에서 혼자,

‘좋은 술 한 잔과 새 드레스, 몸에 편한 라벤더 실크 가운, 다카라즈카, 맛있는 요리 아주 조금’(240쪽)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누리는 중이다.


소설 속 가공인물이지만 우타코 여사는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다.

멋쟁이이고, 쿨하고,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며 인생을 사랑하는.

때로는 까칠하여 살짝 심술도 부리고 못 마땅한 부분에서는 금세 심드렁해지는 거침없는 우타코 여사는,

바로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멋쟁이 할머니 같.

현실에서 이만큼 대차고 현명한 할머니를 만나기는 쉽지 않지만,

우타코 여사가 어려운 시절을 헤쳐 나오며 얻어낸 인생의 지혜는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우타코 여사는 서두에,

‘워낙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는 칠십 년을 살고 나서야 하게 되었다.’(14쪽) -고 말한다.

보통 인생에서 우리는 무조건 행복을 전제로 하고,

지금 누리재물은 항상 모자라여기지만.

사실 생명체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수고로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데서 파생되는 칠난팔고.

여기에 인간들의 탐욕과 왜곡된 가치관, 잘못된 언행과 벗어나지 못하는 갖가지 허물을 돌아보면,

인생은 고해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종종 들.


보통 절대자, 하느님 또는 부처님, 알라, 뭐 이렇게 불리는 세상을 주관하는 어떤 존재를 우타코 여사는 ‘희미한 님’이라 부르는데.

그 ‘희미한 님’이 마치 고리 던지기 놀이를 하듯이,

인생의 갖가지 고뇌가 담긴 고리를 사람들에게 무작위적으로 던진다고 우타코 여사는 말한다.

이를테면 ‘사별 당번’, ‘생이별 당번’, ‘병 당번’, ‘재난 당번’ ‘난폭한 남편 때문에 울며 사는 여편네 당번’, ‘돈 없어 울며 사는 당번’, - 이런 거. 

저어기 하늘에서 휙 던진 고리가 목에 턱- 걸리면 별수 없이 고리에 적힌 고난을 겪는 거다. 

이때 고리를 건 당번이 책무를 게을리하거나 남에게 떠맡기려 하거나 열 받아 집어던지거나 하면,

'희미한 님'은 “이 뻔뻔한 놈 같으니.”하면서,

‘당번을 농땡이 치려 한 벌 당번’ 패까지 다시 걸어주신단다. 

헉!


그러니 느물 느물 게으름을 피우거나, 뻔뻔스럽게 남에게 떠넘기거나, 화를 내며 울고불고하지 않는 게 좋다. 왜냐하면 당번이라는 것은 가책이나 벌과 달라 언젠가 자신에게 할당된 몫이 끝나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이므로, 그렇게 낙심할 필요가 없다. 돌아가며 맡는 당번제니까. (15쪽)



그러니까 내가 묵묵히 닥친 일을 잘 해내면 그 고생은 끝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말씀.

지금의 우타코 여사처럼 어찌어찌 모든 당번을 마치고 목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을 때 (15쪽) - 도 있고,

다른 고리가 잇달아, 심지어 여러 개가 한꺼번에 겹쳐 걸릴 수도 있다.

진부한 얘기지만 내게 고난이 닥쳤을 때,

내가 이를 어떤 태도로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따라 그 고난이 발전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고,

더 깊은 으로 빠지는 시작일 수도 있다.

고난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와서는 길게 혹은 짧게 제멋대로 기승을 부리지만.

그다음 단계가 어찌 되느냐는 대개는 지금 닥친 이 고난을 내가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달려 있고,

어떻게 겪어낼지는 그 사람이 평소에 키워온 역량이겠다.


그래서 우타코 여사는 아들 내외가 오냐오냐 하며 키운 손녀.

자기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그래서 누구에게도 친절할 수 없는,

지금껏 부모의 뒷받침으로 외모 꾸미기와 남들 따라가는 소비 외에는 별다른 모습을 볼 수 없는 손녀의 결혼식을 앞두고 호화스러운 예식에만 신경 쓰고 있는 아들 내외를 답답해한다.


“딸에게는 성대한 결혼식보다 혼자 설 수 있는 힘을 단단히 길러주어야 한다. 하느님이 던져주신 당번 패가 목에 턱 하니 걸려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생긋 웃고는 혼자 당번 노릇을 완수할 수 있도록 키워주는 것, 이것이 부모의 자비다.” (21쪽)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고령 사회에 접어들었다.

소설은 치매, 요양원, 황혼 결혼, 노인들 대상 돈벌이- 같은 노인들과 관련된 부분들도 다룬다.

소설이 쓰일 때쯤에 각종 민간단체와 지자체들이 나서서 노인들의 황혼 결혼 사업에 열을 올렸었나 보았다. 

참, 나, 원.

소설에는 홀로 된 할아버지들이 겪는 일상생활 문제와

할머니들이 겪는 외로움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서로가 결혼 혹은 동거 상대자를 찾으려는 다급한 몸짓들이 상세히 그려지는데.


'평생 사랑할 기회가 없는 당번'걸렸나 보다고 이성 문제에는 무심하며.

시아버님, 남편, 세 아들 통틀어 괜찮은 남자라고는 보지 못했다고 일갈하는 우타코 할머니는,

이성과의 결합으로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풀려는 기대를 납득하지 못하지.


그랬다. 결국 그들 모두는 반려자를 찾으려는 게 아니라, 당장 빠져 죽을 것 같은 바다 위에서 떠다니는 구명대 하나를 필사적으로 챙기려는 절박한 심정일뿐이다. (76,77쪽)


그래서 외친다.


혼자 힘으로 살란 말이다, 의연하게! (77쪽)


우타코 여사가 남녀 간의 사랑을 부인하는 건 절대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동반자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삶을 타인이 구원하리라는 헛된 기대가 아니라,

자신의 삶은 먼저 자신의 힘으로 챙기라는 말이겠지.



작가는 오사카 출신으로 소설에는 그쪽 지방 풍습과 문화가 짙게 배어있다.

19세기에 근대국가 일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수백 개 '번'으로 나뉘어 있던 일본은,

근대국가를 이루면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하나의 국가로 이루려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는데.

여전히 지역적 특색이 우리보다 훨씬 강한 것 같다.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하는 관동(關東) 지방.

오사카(大阪), 고베(神戶),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하는 관서(關西) 지방은,

음식이나 성향, 취향 등 많은 부분이 대조적이라고들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점들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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