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북 2021 응모
라오서는 1899년 베이징의 만주족 후손으로 태어나 어렵게 공부하여 교사가 되었고.
중국어 교수로 런던에 체류하는 경험을 갖는다.
1925년 귀국하여 산동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사직하고.
1936년에 소설 <낙타 샹즈>를 발표한다.
소설은 베이징 거리에서 인력거를 끄는 '샹즈'의 인생행로를 줄기로 하여,
당시 중국 사회, 베이징의 풍광과 혹독한 생활환경, 그 안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세시 풍속, 그리고 다양한 인간상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1930년대 중국은 수도가 남경으로 옮겨가 지금의 북경은 북평(베이핑)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고.
중국은 각지를 본거지로 하는 군벌들로 분할되어 있어 그들 간의 세력다툼과 일본의 침략으로 국민들의 삶은 내팽개쳐진 상황이었다.
소설에서 직접 정치 문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부패하고 무분별한 정치의 반영으로 책임 있는 지휘 없이 무질서와 혼란으로 도탄 지경에 이른 민생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청나라 말부터 의무는 있으되 보호받지 못하고 내팽개쳐진 백성들은 죽음에 이르러 마지막 비명처럼 들고일어나지만.
자기 이익에만 눈이 먼 권력자들은 외세까지 끌어들여 자국민을 짓밟을 뿐,
도무지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전쟁에 끌려가거나 군대에서 도망치거나.
억압과 불안과 공포에 짓눌린 사람들은 각자도생, 약육강식이어서.
책 어디를 펼쳐도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의 이기적인 악전고투가 넘쳐난다.
농촌 출신 샹즈는 부모님을 여의고 살 길을 찾아 열여덟에 무작정 베이징으로 왔다.
큰 키에,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착실한 샹즈는,
지옥에 굴러 떨어져도 착한 귀신이 될(11쪽) 선량하고 우직한 청년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튼튼한 몸뿐이니.
이런저런 막일을 거쳐 인력거를 끌게 된다.
삯을 내는 빌린 인력거를 끌다가
억척스럽게 일하고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아 스물두 살에 마침내 자신의 인력거를 장만한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기쁘고 벅찼을 순간.
밝은 앞날을 상상하며 마음은 두둥실 부풀어 오르는데.
그러나 희망은 대부분 허사가 되는 법이니, 샹즈도 예외는 아니었다. (20쪽)
바른 마음으로 성실하게 자신의 책임을 해내는 사람들이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고.
그 과정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공정한 제도가 마련되어 합리적으로 운용되어야,
사람들은 지금 힘들어도 나아질 앞날을 기대하며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기만과 사기, 새치기와 편법이 횡행하고 억압과 강압으로 정당한 노력이 짓밟힌다면.
살벌한 아수라장에서 원칙도, 규칙도 없이 생존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나만 살겠다고 서로를 벼랑으로 밀어내면서 무작정 발버둥 치겠지.
샹즈가 살아가던 시대가 그랬다.
샹즈의 장점, 즉 근면 성실하고, 정직하며, 고지식하고, 꾀부리지 않는,
제대로 된 일꾼(60쪽) 임을 알아본 야비한 사람들은 샹즈를 이용만 할 뿐.
샹즈의 인내와 노력은 번번이 실패하고 샹즈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행복한 마음이 들게 해 주었던 샤오푸즈와의 슬픈 사랑을 허망하게 잃어버리면서,
좌절과 재기를 반복하며 그래도 사람답게 살아보려 애쓰던 샹즈는 완전히 무너진다.
샹즈는 착실하게 살아갈 이유를 잃은 철저한 패배자가 되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우롱하여 이런 지경으로 만든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절규할 뿐이다.(30쪽)
샹즈가 유일하게 살림을 차리고 살았던.
그러나 특히 마음이 불행했던 시절, 가난뱅이들이 모여 살던 집은 이랬다.
비가 오면 언제든지 허물어질 허술한 방 안에 있다가 그대로 생매장돼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큰 비가 내리면 양곡은 가격이 약간 내릴 순 있지만 그들이 입은 손실은 그 정도로 메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방값을 내고 있지만 집을 수리해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더 이상 입주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경우에나 미장이 한 둘이 와서 진흙, 깨진 벽돌로 대충 무너진 곳을 다시 쌓고 메워놓았지만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몰랐다. 방값을 못 내면 모두가 쫓겨나고 물건도 압수됐다. 집이 낡아 깔려 죽을 위험이 있지만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286쪽)
태생부터, 또는 중간에 삐끗하여 빈손이 된 사람들의 아슬아슬한 인생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회복은커녕 약간의 타격에도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바닥 더 바닥으로 떨어져 간다.
가장 큰 손실은 비를 맞고 병이 드는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거리에서 밥벌이를 했다. 여름날 수시로 내리는 폭우도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으로 돈을 버는 그들은 언제나 온몸이 흠뻑 절어서 다녔다. 북방 지역에 내리는 폭우는 항상 급작스럽고 차갑게 찾아왔다. 때로 호두처럼 커다란 우박이 섞여 떨어지기도 했다. 차디찬 빗방울이 커질 대로 커진 땀구멍에 내리치면 적어도 온돌에 드러누워 한 이틀은 열이 오를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병이 들어도 약을 살 돈이 없었다. 한바탕 비가 내리고 나면 밭에 서 있는 옥수수, 수수는 부쩍 키가 크지만 성 안의 수많은 빈곤층 아이들은 이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비가 내린 후 시인들은 연잎에 맺힌 물방울과 쌍무지개를 노래한다지만, 가난한 집에서 어른이 아프면 모든 가족들이 배를 주린다. 한바탕 비에 기생과 좀도둑들이 늘어나면서 감옥에 가는 사람도 많아졌다....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이에게도, 의롭지 못한 이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사실 비는 공평하지 않았다. 본래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 내리기 때문에.
(286, 287쪽)
자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인 몸으로 밥벌이를 하는 인력거꾼들은,
몸에 들어가는 것보다 노동으로 소진되는 에너지가 더 많으니 일을 열심히 할수록 내 목숨을 깎아내는 셈이다.
이곳에는 열한두 살 때부터 이 일을 하기 시작한 이들도 있는데 그들이 스물 이후에 멋진 인력거꾼으로 탈바꿈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린 몸으로 무리를 하면 여간해서 건장하게 성장하기 힘들다. 설사 그들이 평생 인력거를 끈다 해도 죽을 때까지 인력거꾼으로서 내세울 것이 없었다.
마흔이 넘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10년 넘게 인력거를 끌어 근육이 쇠잔할 대로 쇠잔해 있었다.... 조만간 길가에 고꾸라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도 점차 깨닫고 있었다.
(7쪽)
샹즈가 인력거로 성공해보겠다고 신바람 나게 인력거를 몰았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의 인력거가 생긴 이후로 그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활기를 띄었다. 전세도 좋고 개별 손님을 모셔도 좋았다. 매일 ‘사납금’ 때문에 조급할 필요도 없었으니, 얼마를 끌든 모두 자기 몫이었던 것이다. 마음이 편하니 손님 대하는 것도 한결 부드러웠고, 장사도 더욱 순조로웠다. 이렇게 반년을 끌다 보니 그의 희망도 더욱 커졌다. 이대로 간다면 한 2년, 길어야 2년 안에 인력거를 또 한 대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대, 두 대...., 그렇다면 그도 인력거 임대회사를 차릴 수 있을 것이다!
(20,21쪽)
그토록 희망 넘쳤던 착한 샹즈는 이제 자긍심도, 살아보려는 의욕도, 잘 해내겠다는 의지도 모두 잃어버렸다.
그처럼 깔끔하던 샹즈가 수척하고 더러운 하급 인력거꾼이 되고 말았다. 얼굴이며 몸, 옷, 어느 것 하나 닦질 않았다..... 땀 흘리는 것도 아까웠다.... 지금은 일부러 나쁜 짓을 했다. 그러다 누가 죽어도 상관이 없다. 어차피 인간은 다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357쪽)
샤오푸즈와의 사랑은 샹즈에게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그 사랑을 지킬 수 없는 샹즈의 비참한 처지를 확인해준 가혹한 행복이었다.
애절한 사랑은 슬픔과 절망이 되어 간신히 자신을 지탱해오던 샹즈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타격이 된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샤오푸즈마저 땅 속에 묻히고 말았어! 그도, 샤오푸즈도 성실하고 끈질기게 살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눈물뿐이었다. 샤오푸즈는 목매단 귀신이 되어버렸어! 거적에 말려 연고 없는 이들의 무덤 사이에 묻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런 게 바로 평생을 노력한 결과란 말인가!
(355쪽)
샹즈 인생에 따스한 봄날이 있었다면,
인품이 훌륭한 차오 선생 댁에서 사람대접을 받으며 일했던 날들이겠지.
사실 차오 선생 댁의 품삯은 다른 곳에 비해 많지 않았고 단오, 추석, 설날 등 세 차례 명절 때 받는 돈 이외에 가욋돈도 없었다. 그러나 차오 선생이나 차오 부인은 대단히 상냥하고 누구에게든지 제대로 사람대접을 해주었다. 샹즈는 무엇보다 많은 돈을 벌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럴듯한 방에 살면서 배부를 정도로 충분한 식사를 하고 싶었다. 차오 선생 댁은 구석구석 깨끗한데, 아랫사람이 거처하는 방도 마찬가지였다. 차오 선생 댁은 음식도 괜찮고 아랫사람들에게 더러운 음식을 주는 법이 결코 없었다. 널찍한 자기 방이 있고 세 끼 밥을 여유롭게 먹을 수 있는 데다 주인 또한 겸손하니, 샹즈조차도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됐던 마음을 잠시 거두었다.
(102쪽)
샹즈는 대단한 걸 바라지 않았다.
이렇게 잘 먹고 잘 자면서 깨끗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는 그 속에서 인정을 느꼈고, 아랫사람의 고충을 이해하는 따스한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이제껏 샹즈가 겪어본 주인들의 숫자가 적다고 할 수 없었지만 열이면 아홉은 하루라도 품삯을 늦게 주려고 애를 썼으며, 어떻게 하면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을까 하는 시커먼 속셈을 드러냈다. 게다가 하인들은 근본적으로 개나 고양이, 또는 그보다 못한 족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오 선생 댁 사람들만은 예외였다. 그는 그 집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그는 주인의 분부가 없더라도 마당을 청소하고 꽃에 물을 주었다. 샹즈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언제나 듣기 좋은 말 몇 마디를 건넸다. 또한 이 계절이 되면 그에게 낡은 물건을 꺼내 주며 성냥과 바꿔 쓰도록 했다. 그러나 아직도 쓸 만한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도 그는 주인 내외의 인정을 느꼈다.
(102~103쪽)
샹즈에게 온기를 느끼게 했던 차오 선생은 어떤 분일까?
1920년대 영국 런던에 체류했던 작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사실 차오 선생은 그렇게 고명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때로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다른 일들도 하면서 살아가는, 중간 정도에 속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는 사회주의자로 자처하고 있으나 동시에 유미주의 자이기도 하고 특히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그다지 심오한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신조를 하나하나 실제 생활 속 작은 일에서 실천하고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그는 스스로가 뛰어난 재주를 지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상에 따라 일과 가정을 꾸려가면서, 비록 사회에 큰 보탬이 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언행일치를 하여 위선자 소리는 듣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작은 일에 신경을 많이 썼다..,.. 자신의 집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찾아오는 이들에게 맑은 물과 먹을 것을 제공할 수 있을 뿐, 더 큰 의미를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샹즈는 때마침 그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사막에서 그처럼 오랜 시간을 헤매던 그에게 이곳은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104, 105쪽)
수많은 샹즈를 목격하고, 버둥거리는 그들의 노력이 배반당하는 비열한 현실에 괴로워하면서 작가는 샹즈가 추락해가는 과정을 정밀하게 그려냈을 것이다.
좋은 세상에 대한 이상을 갖고 언행일치를 하는 개인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집을 작은 오아시스로 만들 수는 있었지만.
이런 개인적인 성과만으로는 거대한 중국, 암울한 사회에 구명대가 결코 될 수 없음을,
사회적 차원의 방식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정차장 입구에서 차와 파이, 과일 같은 군것질거리를 팔았던 샤오말의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다.
나도 얼어 죽을지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막일을 하는 사람이 혼자서 잘 산다는 건 하늘 꼭대기에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거지. 메뚜기를 본 적 있지? 혼자 참 멀리 뛰지. 하지만 어린애들에게 잡혀서 실에 꽁꽁 묶여봐. 날지도 못해! 일단 무리를 지어 떼를 이루면 엄청난 농작물을 단번에 먹어치울 수 있어. 아무도 손을 쓸 수가 없지! 그래 안 그래? 맘씨? 그딴 것 좋아봤자 손자 한 놈 지키질 못했어. 놈이 병이 왔는데 약 사줄 돈이 없었어. 그냥 내 품에서 죽어가는 걸 지켜봤을 뿐이야. 말할 필요 없어!
(349, 350쪽)
불의하고 부패한 사회에서 아무리 노력한들 미약한 개인 혼자 자신의 환경을 개선시키에는 한계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출세했다 하더라도 정당하지 못한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이르기까지는,
각종 범법과 악행, 음모와 비리와 밀접하게 협력하기 쉬우며.
그 과정에서 지켜내야 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잃고 탐욕과 거짓으로 인간성이 망가진다.
내가 속한 우리라는 더 큰 단위를 나와 너, 우리가 힘을 합쳐 올바르고 건강한 사회로 만드는 것.
그것이 곧 나와 나의 삶을 온전하게 지켜내는 방법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