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렐 대처 울리히의 <산파 일기>
브런치 북 2021 응모
<산파 일기>, 로렐 대처 울리히 지음, 윤길순 역, 동녘,
로렐 대처 울리히는 미국의 역사학자이다.
다른 학자들이 지루하고 하찮은 일상일 뿐이라고 관심을 두지 않던 18세기 뉴잉글랜드 지역 한 여인의 일기를.
마서 밸러드의 일기가 지닌 위력은 바로 이 일상성,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지독한 일상성에 있다.(24쪽)
고,
사료로서의 가치를 평가하여 오랫동안 깊이 있게 연구했다.
남아있는 마서 밸러드의 일기는 마서가 50세였던 1785년부터 1812년 5월, 사망 삼주일 전까지 27년이 넘는 기간에 쓴 9,965일 분의 방대한 분량인데.
저자는 이 일기를 꼼꼼히 읽고 분석하고 해석하고 분류하면서.
같은 시대 법원이나 행정관청, 지도, 신문 같은 공적 기록과 비교하고.
그 시대, 그 지역 누군가의 일기, 거래 장부, 편지, 문학 작품, 그림 같은 시대의 작은 조각들을 일일이 모으고 분석하고 교차 검증하여.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사회사와 생활사를 정밀하게 복원했다.
로렐 대처 울리히의 헌신적인 연구 덕분에 우리는,
말끔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미남 미녀들이 목가적인 자연환경 속에서 사랑하고 해피엔딩을 이루는 예쁘기만 한 시대극이 아니라.
여섯 자식을 기르고 텃밭 가꾸기를 즐겼으며.
무심한 남편에 섭섭해하고 욕심 많고 폭력적인 자식으로 속을 썩고.
산파 일과 고된 집안일에 힘들어하며 때때로 닥치는 우환에 시달리면서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해냈던,
실존했던 한 인물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할로웰의 산파 마서 밸러드는 시도 때도 없는 탄생의 신호에 부름을 받아,
가깝거나 멀거나 춥거나 덥거나.
얼음이 언 강을 걸어서, 안장 없는 말을 타고, 이 집 저 집 출산을 도우러 다녔다.
이가 득실거리는 오두막에서 밤새 산모와 아기를 돌보고.
전염병이 창궐할 때는 집집마다 누워있는 환자들을 일일이 보살폈다.
산파 일로 바쁘다 해서 주부로서 가사가 면제되지는 않는다.
실을 잣고 비누를 만들고 스튜를 끓이며 맥주를 빚고.
반복되는 청소와 빨래.
스웨터를 뜨고, 집에 온 친척과 손님들을 맞는다.
‘나의 텃밭‘에는 환자에게 쓸 약초와 식구들이 먹을 채소를 키우고.
뒷마당에서는 닭과 돼지를 쳤지.
그 와중에 마서 밸러드는 늘 손에 공책을 들고 다니면서 그날의 날씨와 업무 사항, 받은 보수와 이웃과의 교류, 집안일과 지출, 물건을 주고받은 거래 같은 하루의 일과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건조한 문장으로 짧게 기록했다.
지구 위에 살다 간 사람들 대부분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면서 존재는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교회와 관청이 주민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
또는 우리나라처럼 족보에 이름과 가족 관계, 생년월일과 사망일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 탄생과 죽음 사이의 시간,
숨을 쉬고 키가 자라고 사고력과 감정을 지닌 독자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나날의 희로애락 애오욕과 간절한 소망들,
일상을 지키기 위해 쏟아붓는 노고와 사랑과 미움과 희망과 절망 같은,
마음속에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던 감정은 육신과 함께 소멸되는 것이다.
1735년 매사추세츠 옥스퍼드 시, 무어 집안에 딸이 태어났다.
그 딸 마서는 1754년 이프리엄 밸러드와 결혼해 마서 밸러드가 되었고.
부부는 연이어 아홉 아이를 낳았는데,
1769년 이주일 남짓한 사이에 유행하던 디프테리아로 어린 자식 셋을 한꺼번에 잃었다.
1775년 측량기사인 남편 혼자 캐나다에 인접한,
대서양에서 케네벡강을 따라 깊숙이 들어앉은 개척지 메인주 할로웰로 일을 찾아 떠났고.
1777년 10월에는 마서와 아이들이 뒤따라와 온 가족이 할로웰에 정착했다.
마서 밸러드가 일기를 쓰는 동안 미국은 독립국가가 되었고.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변화가 큰 시기였다.
밸러드 일가가 이주한 할로웰은 겨울이 길고 날씨 변덕이 심한 거친 지역이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숲을 밀어내어 땅을 개간하는 개척지는 이제 도시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중이었는데.
투기꾼인 부재지주들과 직접 땅을 일군 정착민들 사이에는 갈등과 적대감이 컸고.
미국 독립을 둘러싸고 주민들 사이에는 정치적 견해도 나뉘어 있었다.
그럼에도 마서 밸러드가 1785년부터 1812년 사망 한 달 전까지 직접 816번 아기를 받았다는 일기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할로웰에는 이주민이 계속 들어오고 연달아 아이들이 태어나며.
인구와 도시 규모, 경제가 확장되는 활기찬 개척지였다.
이프리엄 밸러드는 측량 일을 하면서 아들들과 함께 제재소와 방앗간을 운영했고,
자녀들이 성장한 마서 밸러드는 산파 일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간다.
마서는 수다스럽거나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일기를 읽어 보면.
낮에 나갔다가 우리 제재소가 화염에 싸인 것을 발견했다. 요새에 있는 남자들이 건너갔다. 두껍고 얇은 널빤지와 함께 제재소가 몽땅 타버렸다. 저녁까지 머물렀다. 나올 때 제임스가 아주 위험할 정도로 아팠다.
(54~55쪽, 1787년 8월)
오전에 흐림. 약간의 비와 천둥, 밤이 되기 전에 갬. 사이러스가 집에 없었다. 오늘 저녁에 우리 읍의 모지스 폴러드 씨와 우리 딸 해나의 결혼을 축하하는 식을 했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가 여기서 머문다.
(168쪽, 1792년 10월)
'우리' 제재소가 몽땅 불에 타고.
'우리' 딸 해나가 결혼하는데 단지 사실만 적을 뿐,
본인의 감상이나 감정은 덧붙이지 않는다.
저자는 그녀의 일기에서 험담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125쪽)고 전한다.
지역에서는 종종 추문이 일어나고 도시가 술렁이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서의 일기에 좋지 않은 소문은 등장하지 않으며,
나타나더라도 본인과 관련이 있을 때 섣부른 평가 대신 사실만을 적었다.
날씨는 일기의 고정 사항이다.
할로웰 한가운데를 흐르는 케네벡강은 지역의 경제활동과 운송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어느 가을날 갑자기 얼었다가 봄이 오면 예상치 못하게 풀려서 위험한 사고가 일어나곤 했다.
변덕이 매우 심한 할로웰의 날씨는 일상생활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봄철 해빙기가 아주 위험한 모험을 제공한다면, 겨울철은 온몸이 얼어붙는 고행의 길을 걷게 한다. 어느 날은 새벽에 폭설이 내리는데도 불러서 나가, 터벅터벅 걸어서 강을 가로질러 “멀리 에스콰이어 하워드의 다리 너머에 있는 들판까지 갔는데” “여자가 무사히 해산했다는 전갈을 받았다”(아기를 받지 않았으니 수고비도 없었다). “두 번 넘어졌다. 한 번은 그쪽으로 가는 길에, 한 번은 돌아오는 길에. 아직도 폭설이 그치지 않았다. 눈이 우리 북쪽 창문의 아래쪽 창까지 쌓였다. 어떤 길은 눈이 내 허리까지 쌓였다.”
(244쪽)
집안일을 도우며 살림을 배우던 딸들과 때때로 집에 와서 집안일을 거들던 여자 조카들이 결혼을 한 뒤에 마서는 혼자 남편과 아들들을 뒷바라지하고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몇 번 동네 처녀들을 고용해봤지만 도움보다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60세가 넘은, 1796년 1월 어느 날, 마서의 일과는 이랬다.
맑고 쾌적함. 아침 10시에 불러서 무어 부인을 돌보다가 스티븐 힌클리의 아내에게 갔다. 그녀가 11시에 아들을 낳았다. 아기 옷을 입히는데 무어 부인이 다시 와달라고 했다. 가보니 부인이 더 안 좋았다. 부인이 4시 30분에 아들을 낳았다. 두 아이 모두 첫아이였다. 저녁 8시에 집에 돌아왔다. 남동생 애버니저 무어가 여기서 잔다. 염주를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집을 청소하고, 저녁을 먹었다. 조금 피곤하다.
(250쪽)
마서는 11월 26일에 덴스모어 집에서 밤샘을 하고 다음날 바로 다른 집으로 아기를 받으러 가야 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거기서 다른 집으로 아기를 받으러 가 두 번째 쥐가 났고, 폭풍우를 뚫고 집에 와서는 끝내지 못한 집안일을 했다. “집안일을 마치고 소금물을 끓였다. 말린 호박도 걷었다.”
불평할 줄 모르는 마서는 속담을 인용한다.
“남자들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일하지만, 여자의 일은 끝이 없다”
(255쪽)
저자는 표가 나지도 않고 가치를 인정받지도 못하는 여자들의 가사노동에 대해,
여성들은 날마다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면서도 금방 사라질 일상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고 의견을 보탠다.(129쪽)
그렇다고 마서보다 열 살 더 많은 남편 이프리엄의 일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고령의 남편은 지독한 날씨와 식량 보급이 어려운 측량지에서 야영하며 모기떼와 날파리들에게 피를 뜯기고.
의뢰자와 고용한 직원들 사이에서 겨우 계산을 맞춰가며 일해야 했다.
빼곡한 숲을 피땀으로 일구어 쓸 만한 땅으로 만들었지만 권리를 갖지 못하는 정착민들은,
얼굴도 보지 못한 지주 대신 땅을 측량하러 온 이프리엄 밸러드를 거세게 위협하고,
종종 출몰하는 강도 떼는 소유물을 몽땅 빼앗아가거나 상해를 입혔다.
누구나 고단하게 일하고 심신의 풍파를 겪으면서 살아간다.
대단한 업적을 바라서가 아니라 그저 내 마음 떳떳하게 살아내는 것으로 삶의 무게는 버겁다.
그러니 인생의 의무를 다한 노년에는 휴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겠지, 기대하지만.
마서 밸러드 부부는 늦은 나이에 개척지에 와서 성실하게 살았고,
한때는 순위권에 드는 세금을 납부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생활 기반을 잡기가 쉽지 않았는지 여러 번 셋집을 옮겨 다니다가 뒤늦게 집을 짓는다.
그러나 그 땅이 아들 소유였으니...
고령의 남편이 채무 문제로 감옥에 갇히면서 집은 아들에게 넘어갔고.
마서는 아들 네가 들어와 살게 된 집, 출입구를 따로 낸 방 한 칸에서 누구의 도움 없이 생계를 꾸려가게 된다.
악화되는 물질적, 육체적, 정서적 고난 속에서도 마서의 일기에는 울분을 터뜨린다거나 누구를 원망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고 한다.
고난을 원망하고 내게 복을 달라고 울부짖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어려움 중에도 선한 길로 이끌어주시는 신께 마서는 조용히 자신의 고통을 의탁한다.
1796년 1월 15일에 마서는 “신께서 내가 지난 세월 해온 것처럼 할 수 있는 힘을 얼마나 오랫동안 주실 지는 신만이 아신다”라고 했다. 마서는 새해를 맞아 일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늙어 힘이 없었다.
(251쪽)
마서는 편하게 해달 라거나 짐을 벗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 않고 힘을 달라고, 그렇게 오랫동안 해온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육체적 능력을 달라고 했다. 마서는 11월에도 인생의 행로가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했다.
(263쪽)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계속되는 고난, 특히 자식에게서 받는 고통은 마음을 지치고 비참하게 만든다.
갈수록 강해지는 부당하게 버림받았다는 생각, 절망을 이겨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제발 내 심신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이러한 기도가 몇 번이나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다.
(276쪽)
늘 주어진 책임에 충실했고.
산파로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도우려고'(125쪽)
했던 마서 밸러드.
나 같은 운명도 없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운명에 따르고 싶다.... 오 신이시여, 내가 언제나 당신의 집에 가서 다시 예배를 볼 수 있을까요?
(1892년 8월 28~29 일기, 280쪽)
비바람을 뚫고 진통이 심한 히스 부인의 출산을 돕고 돌아와 마서의 건강은 악화된다.
1812년 5월 7일을 끝으로 마서의 일기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거의 하루 종일 맑음. 몹시 춥고 바람이 불었다. 며느리 밸러드와 그녀의 자식 여럿이 왔다. 패트리지 부인과 스미스 부인도. 테핀 목사님이 와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내 경우에 맞는 기도를 했다.
(407쪽)
그리고 1812년 5월 31일,
할로웰 사람 헨리 슈얼은 일기에,
“오거스타에서 밸러드 부인의 장례식”(406쪽)
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