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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책

브런치 북 2021 응모

by 기차는 달려가고

오래전,

엉금엉금 움직이기 시작한 아가가

버둥버둥 온몸으로 기어가 그림책을 기어이 손에 쥔 순간부터.

책은 나의 정다운 친구가 되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긴 세월 변함없이 책은 늘 내 곁에 있었고.

책에 쓰인 활자를 보고 또 보면서 스스로 글자를 깨치고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책을 고르고 사고 읽으면서 나는 자라났다.

책은 내게 깔깔 즐거움을 주고 다독다독 마음을 보살피며.

벅찬 감동과 찡한 공감과 아하, 깨달음과 조용한 가르침을 주었다.

세상이라는 격랑을 건너가는 내게 노가 되어주고,

때로는 하늘의 반짝이는 별로 방향을 가르쳐주는.

그 모든 것을 주기만 하는 속 깊은 친구이며 다정한 스승인 나의 친구 좋은 책들에게,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책들을 써낸 저자들께,

오랜 독자로서 나는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고마워, 좋은 책들.

그리고 좋은 책을 써주신 동서고금 수많은 저자 분들.

깊이 감사드립니다.

일일이 찾아뵙고 두 손 맞잡고 눈을 맞추며 절절한 감사 인사를 드려야 옳겠지만.

방구석에 들어앉아 있을 뿐인 나는,

책방과 도서관을 통해 만나온 사이인 우리답게 변변치 않은 글을 통해 저의 고마움을 담뿍 전합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책에 관한 나의 이 글이

힘들고 외롭게 좋은 책을 써온,

지금도 어디선가 홀로 고군분투 중일 훌륭한 저자 분들께 작은 찬사가 되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가까이하는 독자가 되어 좋은 책들을 더 자주 만나고.

내가 책에서 받았던 즐거움과 감동과 공감과 위안을 또한 흠뻑 누리시길 바란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W. G. 제발트는 그의 책 <현기증, 감정들>에서,

잠깐 등장하는 살바토레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한다.


······ 퇴근 후 나는 산문 속으로 구원을 찾아 떠나는 겁니다, 하고 살바토레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섬으로 휴가를 떠나듯이 말이죠. 온종일 소음이 홍수를 이루는 편집국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가, 저녁이 되면 내내 나만의 섬에 있게 되는 셈이죠. 그리고 책의 첫 번째 문장을 읽기 시작하면 노를 저어 물 가운데로 점점 더 멀리 나아가는 느낌이 들곤 한답니다. 오직 저녁시간의 이런 독서가 있었기에 나는 이날까지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아올 수가 있었던 거지요.

(W. G. 제발트, <현기증, 감정들>, 123~124쪽)


좋은 책은 그 주제가 무엇이든,

문학이든 과학이든 그 어떤 분야를 다루든.

결국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 그 답을 탐구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사람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거지?

갈팡질팡 혼란스러운 우리는 묻는다.

또한 이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궁금하고 또 궁금하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치열한 노력이 책에는 담겨있다.


좋은 책이란 가장 현실적인 기반에서 진실이라는 추상의 목표를 향해 발을 내딛고.

그래서 우주의 현상과 그 이면, 인간과 세상의 진실을 탐구하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때로 나는 어지러운 현실을 외면하여 책의 세계로 도망치기도 하는데.

세상에 등 돌려 읽어버린 수북이 쌓인 책 더미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책을 통해 들여다본 다양한 사람들과 삶을 통해서,

광활한 우주와 무한한 시간이라는 차원에서.

내게는 내가 전부인 유일한 존재이고 내 인생은 단 한 번의 유한한 시간이지만.

동시에 나는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 중 하나이며,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 선상에 단지 점 하나로 존재했다 사라지는 유한한 생명체임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층 담담해진 마음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명료하게 상황을 파악하여.

좋거나 싫거나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의연하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내게는 그랬다.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보고 또 보고.

묻고 또 물으며.

겪고 또 겪은.

그리하여 관찰하고 번뇌하고 사유하고 또 사유한 것들을.

거르고, 거르고 걸러서 최상의 정수만을 담백하게 풀어놓은 현자들의 책은,

살아가면서 겪은 나의 경험들과 바라본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 단지 내 한 몸의 단위에서 벗어나 더 큰 차원에 시선을 두고,

궁극으로 향하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늘 가늠하라, 고 책은 속삭이는 것이다.


책이 아니면 어디서 이렇듯 진지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듣겠는가?

현인들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면은 쑥스러움에 딴청을 부리면서,

흘러가는 구름 같은 이야기나 중얼거리겠지.

참된 진리를 궁리하고 깊은 사유로 태양계를 통찰하는 선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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