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행의 무게, 인생의 무게

마음에 남은 풍경들

by 기차는 달려가고

인간의 문명은 이제 자연의 질서까지 휘젓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인간 자체는 갈수록 약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다른 동물들은 몸 하나로 평생을 살아내고 잘도 이동하는데.

또 옛날 사람들은 짚신 신고 바랑 메고 천리길을 걸었다는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체 자체는 경쟁력을 잃어간다는 생각이다.


집을 떠나려면 이 한 몸이 입고 쓰는 물건으로 짐이 한가득이다.

물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나는,

여행을 가면 한 곳 본거지를 정해 큰 짐을 내려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주변을 돌아다닌다.

이번에도 서귀포와 제주 시내 한 숙소에 계속 머물며 작은 배낭 하나만 메고 돌아다녔는데.

아예 떠날 때부터 최소한의 물건만 작은 배낭과 손가방에 짐을 꾸렸다.

나도 해본다, 미니멀! 정신으로.



땀으로 매일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여름도 아니고.

두툼한 겉옷에 방한복을 입어야 하는 겨울도 아니어서 가능하긴 했다.

추우면 하나씩 껴입고 더우면 하나씩 벗으면서 날씨 변화에 무리 없이 대처했다.

손빨래를 하고 숙소에 있는 소모품을 쓰고 먹을 것은 현지에서 조달했다.

천천히 아침 먹고 느릿느릿 나와서 낮에 몇 시간 돌아다니고는,

저녁 일찍 들어가는 사람이라.

아침과 저녁은 숙소에서 계란, 과일, 채소와 떡, 빵, 육포, 김밥, 차 같은 것을 간단히 차려먹었다.

최소의 기초화장품만 들고 가는 바람에 피부가 엉망이긴 하다.


우산은 늘 들고 다니는 작고 가벼운 접이 우산을 가져갔는데.

어느 날 저녁 다섯 시가 좀 넘었는데 갑자기 세상이 시커메지면서 우박 같은 무거운 비가 와락 쏟아지더니,

시간의 벽에 갇히면 이럴까, 싶은.

순식간에 세상은 빗줄기의 커튼으로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작은 우산은 거센 바람에 꺾여서 소용이 없었다.

눈을 뜨기도 어려운 무섭게 내리 꽂히는 제주도의 빗방울을 겪어보니 우산보다 긴 우비가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만.

그날 그 비는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게 세찼다.

몇 초도 안 되어 홀랑 젖은 나는 발걸음을 떼기도,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어서.

무작정 바로 앞에 있는 한약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 그칠 때까지 있으라고 친절하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더라.



짐을 들고 비행기나 대중교통으로 장소를 옮겨 다니는 일은 참 고되다.

낑낑 짐을 들면서 이 짐의 무게가 내 인생의 무게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여행자가 있을까.

그래서 여행을 다녀오면 인생도 가볍게 살아보자, 각성은 하는데.


1980년 대 파리에 갔을 때 당시 일본인들이 줄 서서 사대던 브랜드 가방 상점에는 각진 여행가방들이 있었다.

크고 무거운 가방들에 바퀴 같은 건 애초부터 달려있지 않더군.

19세기와 20세기 초,

부유한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이 여행에 가져가는 수십 개의 가방은 모두 하인들이 들었기에.

아랫것들이야 등골이 휘든 말든 주인 눈에 가방 모냥만 좋으면 됐던 거지.

그 무거운 가방에 바퀴 하나 달아주지 않고 나의 무게를 몽땅 떠넘기면서

신사, 숙녀들은 몇 푼 팁을 던져주고는 자신이 너그럽다고 자랑스러웠을까.


자신의 짐은 스스로 감당해봐야 필요한 것, 불필요한 것을 분간하게 된다.

하여 오랜만에 여행을 다녀오니 미니멀! 정신이 무럭무럭 자라나더라는 얘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행이 끝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