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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Feb 13. 2022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다이도지 신스케의 반생』

활자로 만난 인물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집, 송태욱 옮김, 서커스 출판 상회  



'어느 정신적 풍경화'라는 부제가 은 이 단편소설은,

1892년에 도쿄에서 태어난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1924년에 쓴 작품이다.



다이도지 신스케(大導寺信輔)가 태어난 곳은 혼조(本所)의 에코인(回向院) 근처였다.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 중 아름다운 거리는 하나도 없었다. 아름다운 집 역시 하나도 없었다. 특히 그의 집 주변에는 움막을 짓거나 목욕통을 만드는 목공소며 막과자를 파는 가게며 고물상뿐이었다. 그런 집들에 면한 길도 진창 아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그 길의 막다른 곳은 오타케구라(竹倉)의 큰 도랑이었다. 수초가 떠 있는 큰 도랑은 늘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물론 이런 동네에 우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620, 621쪽)          


에도 시대가 끝나고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가 휙휙 날아가던 19세기말.

날로 성장하는 근대도시 도쿄에서,

에도시대의 활기를 잃고 뒤처진, 강 건너 낮은 동네 혼조에는  한 소년이 자라고 있었다.    

 

몸과 어울리지 않게 머리가 크고 쓸데없이 눈만 빛나는 병약한 소년이었다. 게다가 안색이 안 좋은 그 소년은,

(634쪽)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소년의 마음에는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괴로움이 있었다.

모성의 부재와 (소설에서는 아니지만, 친부모의 자식으로 못하는) 어둠은 떨칠 수 없는 고통으로 소년을 짓누른다.     


조금이라도 약점을 보일 경우 친구는 곧바로 그의 비밀을 간파해 버릴 것이다.

(625쪽)          



가공의 이야기인 소설이고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읽다 보면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개인사를 떠올리게 된다.

어머니의 정신병으로 태어나서 곧 부모의 손을 떠나 외가에서 키워진 작가는,

어머니 사망 후 정식으로 외삼촌 부부에게 입양되어 외가의 성(姓)을 따르게 된다.


어머니처럼 정신병이 발발할까, 하는 두려움과.

자신을 키워주는 외삼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부채감을 고백한 바 있는 작가는,

같은 단편집에 수록된 짧은 소설  『점귀부(点鬼簿)』를 이렇게 시작한다.   

  

나의 어머니는 광인이었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어머니다운 친밀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머리를 끈으로 묶지 않고 빗에 감아 틀어 올리고 늘 시바의 친가에 혼자 앉아 긴 곰방대로 뻐끔뻐끔 담배를 피웠다. 얼굴도 작지만 몸집도 작았다. 또 얼굴은 어쩐 일인지 전혀 생기가 없는 잿빛이었다. 나는 언젠가 서상기를 읽다가 토구기니취미라는 구절을 만났을 때 순간적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여위어서 홀쭉한 어머니의 옆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나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전혀 없다.

(646, 647쪽)     



아픔을 품고 자라는 소년은 특히 섬세한 정서와 명석한 두뇌로 민감하게 주변을 감지하는데.

소년 눈 비치는 어른들의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스케의 집은 가난했다. 하지만 그들의 가난은 쪽방에 잡거 하는 하류 계층의 빈곤이 아니었다. 겉모습을 꾸미기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하는 중하층 계급의 빈곤이었다. 퇴직한 관리였던 그의 아버지는 저금에서 나오는 약간의 이자를 제외하면 1년에 5백 엔의 연금으로 하녀를 포함한 다섯 가족의 입에 풀칠을 해야 했다. 그 때문에 물론 몹시 절약해야 했다. 그들은 현관과 다섯 칸짜리 집, 게다가 조그만 뜰이 있는 솟을대문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누구도 새 옷 같은 건 좀처럼 짓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상 손님에게 내놓을 수 없는 질 나쁜 술로 저녁 반주를 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어머니 역시 하오리 속에 기운 자리투성이의 오비를 감추고 있었다, 신스케도, 아니 신스케는 아직도 니스 냄새가 나는 그의 책상을 기억하고 있다. 책상은 낡은 것을 샀지만 겉에 바른 녹색 나사지도, 은색으로 빛난 서랍의 쇠장식도 얼핏 깔끔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나사지도 얇고 서랍도 제대로 열린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의 책상이라기보다는 그의 집의 상징이었다. 겉만은 늘 꾸며야 하는 집안 생활의 상징이었다.

(627쪽)     


결벽한 소년은 빠듯한 집안 살림보다 쇠락한 형편에서 허세를 부리는 부모의 위선과 거짓을 미워하고.

그렇게 미워하는 마음은 다시 죄의식이 되어 마음에 괴로움을 더한다.

유별나게 뛰어나서,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좁은 동네를 벗어나 도쿄의 중심부에 다가가는 소년은,

입신양명의 시대.

강력한 권위로 학생들 위에 군림하며 오직 성공을 향한 주입식 교육을 퍼붓는 교사들의 태도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

학교를 미워하지만 반항하거나 뛰쳐나갈 수도 없는 처지.

빤히 보이는 잘못을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니.   

  

하지만 교육상의 책임’. 특히 학생을 처벌하는 권리는 저절로 그들을 폭군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편견을 학생의 마음에 접종하기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633쪽)          


상급학교로 갈수록 높은 동네,

그러니까 일본제국의 중추를 이루는 계급 출신의 동급생들이 많아진다.

아직 자아가 확고하지 못하여 반짝이는 모든 것들에 끌려가는 청소년 시기의,

눈치 빠른 소년은.

부유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 집안의 동급생들을 의식하게 되고.

누구보다 뛰어난 자신의 재능과 초라한 처지라는 괴리감에 흔들린다.

민감한 소년은 동급생들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느낀다.     

소년은 학교에서 불행하다.


신스케에게는 학교 역시 어두운 기억만 남아 있다. 그는 대학 재학 중에 필기도 하지 않고 출석한 두세 개의 강의를 제외하면, 학교의 어떤 수업에서도 흥미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몇몇 학교를 통과하는 것은 간신히 빈곤을 탈출하는 단 하나의 구명대였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에 신스케는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분명하게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빈곤의 위협은 흐린 하늘처럼 신스케의 마음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이나 고등학교에 다닐 때 몇 번이고 자퇴를 계획했다. 하지만 빈곤의 위협은 그때마다 어둑어둑한 미래를 보여주며 함부로 그것을 실행할 수 없게 했다. 그는 물론 학교를 미워했다. 특히 구속이 많은 중학교를 미워했다.

(631, 632쪽)     


하지만 그에게도 다소의 행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들도 신스케에게는 흐린 하늘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빛이었다. 증오는 어떤 감정보다도 그의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630쪽)               



흐린 하늘 같은 마음이었다지만 사실 소년 신스케는 힘겹고 슬픈 가운데에서도 차곡차곡 자신을 키워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소년은 세심하게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이를 충분히 느낄 줄 아는 감각이 있었다.

슬픔이 스며든 처연한 아름다움이더라도.

누추한 풍경에서 소년은 자신만이 느낄 줄 아는 아름다움의 지점을 가졌다.

소년이 때때로 느끼는 아름다움이 뾰족뾰족 솟구치는 증오심을 부드럽게 보듬어 주었겠지.

분노와 시기심으로 스스로를 상하게 하다가도,

순간순간 주변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과 감동이 날카롭게 베인 상처를 치유해 주었으리라.    

 

철들고 난 이후의 신스케는 늘 혼조의 거리를 사랑했다. 가로수도 없는 혼조의 거리는 항상 모래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신스케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것은 역시 혼조의 거리였다. 그는 너저분한 거리에서 막과자를 먹으며 자란 소년이었다...... 혼조의 거리는 비록 자연이 부족했다고 해도 꽃을 피운 지붕의 풀이나 웅덩이에 비친 봄날의 구름에서 뭔가 애처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런 아름다움 때문에 어느새 자연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에 점차 그의 눈을 뜨게 한 것은 혼조의 거리만이 아니었다. 책도, 그가 초등학교 시절 몇 번이나 열심히 읽은 도쿠토미 로카의 자연과 인생이나 러보크의 자연미론번역본도 물론 그를 개발시켰다. 하지만 자연을 보는 그의 눈에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확실히 혼조의 거리였다. 집도 수목도 거리도 묘하게 초라한 거리였다.

(621, 622쪽)          



소년은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았다.

오직 순수하고 투명한 거울처럼 소년은 자신의 행위와 속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훑어보면서.

두뇌의 대견하고 똑똑한 통찰만이 아니라,

속좁고 부끄러운 것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런 자신을 탓할 줄도 알았다.

구니키다 돗포를 모방한 자신의 거짓 없는 기록(かざるの‘),

(628쪽)

을 쓰면서.

자강술(自强術)의 도구(633쪽)로 삼았다고 소년은 말한다.     


변명하지 않는다.

나쁜 마음이 아닌 척, 착한 척, 잘난 척하지 않고.

허물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강인한 사람은 자신의 허물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인정한다.

그럼으로써 그 허물이 무럭무럭 자라 자신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게끔 두지 않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좋고 나쁜 모든 것을 토로하는 소년의 거짓 없는 기록은,

성찰과 반성으로 자신을 바르게 성장시키는 발판이 된다.  


        

무엇보다 소년을 행복하게 해 준 것은 책이었다.

초등학교 때 읽기 시작한 책은 소년을 사로잡아버렸다.     


그 정열은 30년간 끊임없이 그를 지배했다. 그는 종종 책을 읽으며 밤을 새운 일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책상 앞, 전차 안, 화장실, 때로는 길거리에서도 열심히 책을 읽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책 안에서 몇 번이나 웃고 울었다. 그것은 이른바 전신(轉身)이었다. 책 속의 인물로 변하는 일이었다. 그는 인도의 석가모니처럼 무수한 전생에서 빠져나왔다. 이반 카라마조프를, 햄릿을, 안드레이 공작을, 돈 후안을, 메피스토펠레스를, 여우 라이네케를.

(636, 637쪽)     


책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책 속의 온갖 슬픔과 기쁨, 좌절과 용기, 죄와 벌과 선행과 악행, 고통과 희열에 고스란히 공감한다.

소년은 책이라는 세계를 탐험하면서 세상을 알아가고 인간을 이해하며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어간다.     


이런 신스케는 또 당연히 책에서 온갖 것을 배웠다. 적어도 책에서 힘입은 바가 전혀 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그는 인생을 알기 위해 거리와 행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행인을 바라보기 위해 책 속의 인생을 알려고 했다. 그것은 어쩌면 인생을 아는 데 멀리 돌아가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리의 행인은 그에게 단지 행인에 불과했다. 그들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랑을, 그들의 증오를, 그들의 허영심을 알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수밖에 없었다. 책을, 특히 세기말 유럽이 낳은 소설과 희곡을. 그는 그 차가운 빛 속에서 드디어 그 앞에 전개되는 인간 희극을 발견했다. 아니 어쩌면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그 자신의 영혼도 발견했다. 그것은 인생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혼조의 거리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하지만 자연을 보는 그의 눈에 다소의 예리함을 더한 것은 역시 몇 권의 애독서, 그중에서도 특히 겐로쿠 시대의 하이카이였다. 그는 그것들을 읽었기 때문에 도읍에 가까운 산의 모양, “울금 밭의 가을바람, “앞바다에 내리는 초겨울 비에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돛, “어둠 속을 날아가는 해오라기 소리, 혼조의 거리가 가르쳐주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신스케에게 책에서 현실로는 항상 진리였다. 그는 반생 동안 몇 명의 여자에게서 사랑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 한 사람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적어도 책에서 배운 것 외에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는 햇빛을 투과시킨 귀나 볼에 떨어진 속눈썹의 그림자를 고티에나 발자크나 톨스토이에게서 배웠다. 그 때문에 지금도 신스케에게 여자는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만약 그것들에서 배우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여자 대신 암컷만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637, 638, 639쪽)



특히 뛰어난 사람은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으며.

대개의 사람들이 아직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홀로 사유한다.

그래서 얻은 통찰이 기쁨과 혜안을 주기도 하겠지만.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먼저 아는 괴로움과 외로움이 있으니.


그나마 일본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움직임이 있었던 다이쇼 시대가 끝나고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시점에.

작가는 '몽롱한 불안'이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서 <줌 인 러시아 1권,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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