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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Mar 31. 2022

공인과 사생활

끄적끄적

앞에 소개한  <문학의 도시 런던>에는 시인 바이런이 파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황급히 바이런의 일기를 활활 타고 있는 장작난로에 던져 넣는 출판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로 인해 출판인은 대시인의 내면을 밝힐 중요한 단서를 인멸했다는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는데.

음.


예전에 근대 일본 대표작가들의 전집을 훑어본 적이 있었다.

나의 일본어는 한자와 조사 몇 개로 내용을 대충 짐작만 하는 실력이라,

문장이 짧고 한자가 대부분인 작가 연보만 보았다.

평론가들이 작가 개개인에 대해서 어찌나 꼼꼼하게 파헤쳤던지,

작가 자신에 관해서는 물론,

어느 작가의 연보에는 누구와 몇 년 결혼생활을 해온 작가의 여동생이 이혼한 사실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작가의 작품세계와 전혀 관련 없는 이 부분에서 절로 한탄이 나오더라.

이 무슨 관음증이란 말인가!



어떤 예술 작품을 좋아하면 그 작가를 알고 싶어 진다.

독자의 권리로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겠다면서 작가라는 한 인간을 속속들이 알려하지.

인간으로서 지켜줘야 할 사생활과,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을 쓴 공인으로서.

한 개인이 드러내야 할 부분과 드러내지 않아도 될 부분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으므로.

자들은 작가의 어디까지 파고들 권리가 있는 것일까?


영화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미술품이든.

단지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는 것에 만족해야겠지만.

유명인은 그 자체로 상품이라는 생각이라,

우리들은 쉽게 유명인이라는 사람을, 알려지지 않은 이면을 파헤치면서 이러쿵저러쿵 하려 든다.


작가도 그런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정치인, 예능인, 대중문화 관련자들은 적극적으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구하는 직업이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지를 팔아 인기를 모은다.

그 인기는 돈이 되고, 명예가 되고, 직위가 되고, 자랑스러운 정체성이 되니.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라도, 아니 사실은 예쁘게 색칠한 나를 내보이면서 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절실하게 갈구하는 것이다.


본질은 그것이 아니었을진대,

그 유명인의 출발이 어디였는지는 잊고.

대중이 유명인이라는 사람을 소비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유명인도 심장을 갖고, 수치심과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유명인의 비밀을 털어내거나 무자비하게 공격하거나.

심지어는 사실을 조작하고, 모함하는 비열한 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러서,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을 파멸까지 몰고 가는 잔인악마들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 그 출판인이 바이런의 일기를 불태웠는지 모르겠으나.

단지 이해관계를 떠나 순수한 인간의 마음으로,

안 그래도 선을 넘는 애정행각으로 평생 떠들썩했던 시인인데.

그의 일기가 세상에 드러나면 세상은 이미 죽은 자의 사생활을 까발리면서 또 얼마나 와글거릴까, 싶지 않았을까?

살아서 소동을 달고 다녔으니,

죽어서는 조용히 쉬시게나, 하는 심정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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