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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Apr 20. 2022

밥이라는 번뇌

음식에 관한 단상들

지금 우리나라는 기아에서 벗어나 음식을 도락으로 즐기는 단계가 되었지만.

지구에서 살아갔던 인류의 대부분,

아마 현재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상당수도,

끼니를 걱정하며 먹을 것을 구하느라 전전긍긍 살아간다.


매일 일정량, 허기지지 않는, 안정된 식생활을 이어간다는 건 당연하지 않더라.

온 힘을 다해 밥을 구하고 안전한 잠자리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생명체로 태어난 존재의 숙명이다.

태생부터 존재는 밥벌이의 슬픔과 동행하는 건가?


번뇌의 뜻을 초록창에서 찾아보니,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워함. 또는 그런 괴로움.

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이라네.



살아내위해서는 먹을 것을 구해야 한다.

아무리 숭고한 이상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고매한 존재가 되었어도 밥을 얻지 못하면 목숨을 이어갈 수 없다.

먹이를 손에 쥐기 위해 같은 먹잇감을 노리는 이들과 다퉈야 하고.

손에 쥔 것으로 얼마나 버틸지 몰라 더, 더 마련해야 하고.

또는 단순히 이기고 싶어서 소유를 욕망하고.

더해서 소유와 지위는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니...

위장을 채우는 것에서 시작한 생존 욕구는 (어느 선에서 통제되지 않으면), 존재를 압도하는 욕망으로 자라난다.

도무지 몸과 마음이 편할 새가 없구나.


어떤 방법으로, 어디까지 밥벌이에 '나'를 팔 것인가!

내 안의 욕구와 노동자로서 나에 대한 요구는 상충되고.

그 사이에서 괴로움과 갈등으로 시달린다.

나를 다 던진다 해도 밥벌이는 만족스럽지 않은데.


그러나 번민하고 괴로워할 수만은 없으니.

어느 선에서 마음의 고통은 의식 아래로 눌러버린다.

파우스트 박사의 손을 꼬옥 잡을 수도 있겠고.

속세를 떠나 자연인으로 괴로움을 털어버릴 수도 있겠지.

술이 진정제가 되어주기도 하겠고.

손에 들어오는 돈과 지위가 보상이 되는 이도 있겠다.

다수는 점점 안정되어 가는 가정과,

자식을 안정적으로 키울 수 있는 수입과,

구할 수 있는 소소한 행복으로 고단함을 달래겠지.

인생, 뭐, 별 거 있나? 하면서.



부모의 보호 안에서, 다 그런 건 절대 아니지만,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성장해서.

이상이라는 방향성을 키우며 성인기에 접어든다.

그러다 사회인으로 현실세계에 직면하면서,

어디까지 현실에 나를 맞출 것인가, 심한 갈등을 겪지.

이 과정에서 철없었던 시절의 꿈과 이상적 가치를 쉽게 포기하고,

지극히 현실형이 되어 처세만을 고민하는 사람도 있겠고.

사회인으로의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해 존재의 형태를 고민하면서 갈팡질팡 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살아있는 한 계속될 것 같은데.


사회적 욕망이 한창 뻗어가는 30대를 지나면서 불혹이 될 무렵에는,

자신의 어디까지를, 얼마만큼 밥벌이에 헌신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급적 사회인으로서 '아무개'에 전부를 걸지 말고.

인간 아무개의 고유한 정체성을 따로 발전시킬 수 있을 만큼,

시간과 체력과 에너지와,

무엇보다 순수한 마음과 올바른 가치관을 따로 간직하여.

밥벌이를 하는 동시에,

홀로, 조용히 자신이라는 존재를  키워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생각했다고, 소망했다고, 결심했다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내가 동쪽을 바라보며 걷는 한, 최소한 서쪽으로 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더딜 수도 있고, 조금밖에 못 갈 수는 있지만.



나만의 아름다운 방향성을 찾아내고.

신념을 최대한 따라서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삶을 납득할 수는 있겠지.

비록 서글픈 처지라 해도 말이다.

그렇게 떳떳한 방향성을 가질 때 나의 밥벌이가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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