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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Jun 11. 2022

손절하기까지

끄적끄적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관계는 피할 수 없다.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정서적인, 물리적인 힘과 도움을 주고받는 동시에 불편과 부담을 주기도 한다.


혈연관계처럼 나의 태생적인 조건인 경우도 있고.

학교 친구나 동료처럼 일정 시간 같은 카테고리 안에 있다 보니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자의적으로 선택한 관계지만,

사실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아주 좁은 선택지가 있을 뿐이었다.

어떤 관계든 우리는 서로와 언제나 좋은 관계를 갖기를 바라는데.


음, 그게 지 않지.



인간관계의 '손절'에 관한 이야기를 듣거나 본다.

더는 그 사람과 아는 관계로 있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처음부터 꼭 성향이 잘 맞고 의견이 일치해서 친해지는 게 아니다.

특히 어릴 때일수록 가까이 살다 보니,

자주 마주치다 보니,

학교를, 학원을 같이 다녀서 친구가 된다.


그러나 상황은 늘 변하고 사람 또한 달라져서.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게서 다른 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서로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심리적인 갈등이 있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내면을 투사해 인간관계를 아주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관계가 지속되기 어렵다.


그러니까 인간관계도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이 자연스럽게 오는 경우도 있지만

일방적인 '손절'의 형태로 올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가끔 '손절당한' 입장의 글을 본다.

몹시 불쾌해하며 그 이유가 궁금해서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겠지.


나는 손절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인간관계에 냉정한 편이기는 했는데 그래도 10 대 이후로 주변 사람들과 대체로 무난하고 폭넓은 교우 관계를 가진 편이었다.

그러다 40대 언저리부터 손절을 시작해 지금은 거의 세상을 손절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니 '손절하는 사람'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겠다.



내 경우 상대방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다.

평소에 불만이 있어도 말을 하지 않고 넘기다가 상대의 언행이 임계치를 넘는 순간,

그 사람은 저절로 내 시야에서 벗어난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화를 내고 불만을 터뜨리며

상대에게 이러쿵저러쿵 하는 과정을 통해 손절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문이 저절로 닫힙니다.

차를 달리면 지나간 풍경이 더는 보이지 않듯,

스르르 그 사람이 나의 인식 범위에서 사라진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아 상대를 더는 견뎌내지 않겠다는 의미인데.

그렇다고 상대에게 이야기할 만한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본질이 그러한 거고.

그 본질이 싫다는 건데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내가 상대의 어떤 점이 싫다한들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

나는 누구에게도 그런 월권은 하지 않는다.

다만 싫은 내가 피하는 것일 뿐.

융통성도 없는 성격이라 되돌리지도 않는다.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아요.



손절당하면 불쾌한 기분이 들겠지만.

그냥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였어, 하고 흘려보내는 거다.

함께 했을 때 정직하고 진심이었으면 된 거지.


사람은 가고, 또 온다.

순간에 충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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