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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Nov 21. 2022

나로 존재하기 위해

책을 기록함

<타너가의 남매들>,  로베르트 발저 지음,

김윤미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전에 읽은 W.G. 제발트의 <전원에 머문 날들>에 소개된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책들을 읽고 있는 중이다.


로베르트 발저가 20대 후반의 나이에 쓴 <타너가의 남매들>은 전형적인 소설의 구조를 갖춘 작품이 아니다.

자전적인 이 소설은, 지몬이라는 화자가 주로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풀어간다.



지몬은 시골학교 교사인 누나에게서 겨울을 보내고 길을 떠난다.

누나가 말한다.


"이 작은 트렁크에 들어가는 거 말고는 정말로 다른 물건을 없니? 정말로 가난하구나. 여행 트렁크 하나가 네가 이 세상에서 거하는 집의 전부라니, 뭔가 매혹적이면서도 처량한 데가 있구나. "(227쪽)


학자로 자리 잡은 큰형은 ,

취직도 잘 하지만 금세 뛰쳐나오는 동생 지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지금 너는 삶의 모퉁이나 틈새로만 가만가만 다니는 거지.(12쪽)


지몬 본인도 직장 상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저는 고꾸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삶과 겨룰 생각입니다. 자유도 안락함도 맛볼 생각 없어요. 개한테 뼈다귀 던져 주듯 그렇게 덜썩 던져 주어지는 자유는 증오합니다.

(20쪽)



을 쓰는 지몬은 그러나 생계 때문에 일을 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다가 뛰쳐나오고.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일자리를 찾는,

평범하지 않은 지몬을 사랑하는 처녀 로자는,


로자는 젊은 남자 친구에게 그녀의 작은 손을 건넸고, 친구는 이 손에 입을 맞추고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가 가고 없자 어린 로자는 오래도록 혼자 가만히 울었다..... “이렇듯 사람은 그럴 가치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하고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그렇지만 가치를 매기고 싶어 사랑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가당치도 않지, 사랑스러운 연인을 갖고픈 마당에 가치가 무슨 상관이람."

(24, 25쪽)



글을 쓰는 지몬과 그림을 그리는 작은 형 카스파.

이들 청춘은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간다.

슬렁슬렁, 마음 내킬 때, 여분의 에너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술은, 창작은,

너의 인생을 몽땅 바치라고, 헌신하라고,

당당히 명령한다.


예술가는 자주 사랑을 뭔가 자신을 저지하는 것으로 여겨 떨쳐내야만 한다는 것을 저는 이해해요.

(112쪽)


창작을 할 수 있길 원한다면 그는 자기 주변의 모든 걸 잊어야 해. 가장 소중한 것조차도. 사랑과 진심을 온전히 창작으로 옮겨 놓기 위해 그런 창작은 모든 사랑스럽고 진심어린 것들을 모조리 없애길 요구하거든.

(280쪽)



트렁크 하나 들고 이리저리 떠도는 지몬.

쾌활하고 기백이 넘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청년이지만.

가난을 견디면서 시간과 재능을 쏟아 글쓰기에 헌신하기란 쉽지 않다.

거의 모든 안락함, 안정적이고 소박한 생활, 삶의 자잘한 즐거움, 내일에 대한 희망-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사실 여름엔 많은 게 필요하지 않잖아. 그러나 겨울이 된다고! 겨울이 약간 두려워. (353쪽)


보시다시피 저는 똑바로 서 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텨야 할 지경으로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요. 더 이상 일어설 생각이 안 들 때에만 쓰러질 겁니다..... 인생은요, 그건 저한테 그렇게 반짝일 필요가 전혀 없어요. 이미 제 눈 속이 반짝이는 마당에요. (299쪽)

     


그는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자신의 인생을 긍정한다.

계속되는 불행을 인생에 품어버렸다.


불행은 교육자이니까요. 그러니까 이 번쩍이는 한 잔 와인으로 높이 기리자고요. 한 번 더! 그렇죠. 감사합니다.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불행의 친구입니다. 그것도 아주 진심 어린 벗이죠. 불행은 친밀감과 우정을 얻을 자격이 있거든요. 불행은 우리를 더 낫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걸 우리에게 베푸는 대단한 서비스지요. 올바른 사람이라 한다면 거기 보답해야 마땅할 진정한 우정의 서비스요, 불행은 우리 인생의 다소 퉁명스럽지만 그런 만큼 더 솔직한 친구입니다.... 처음 순간에 우리는 불행을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행이 오는 순간 그것을 증오하지요. 불행은 참으로 섬세하고 조용하고 예고 없이 와 우리를 늘 깜짝 놀래 주는 녀석이죠.... (300쪽)


... 그래요, 숙명, 불행은 멋진 겁니다. 좋은 거예요. 그 반대인 행복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불행은 두 가지 무기로 무장하고 나타나지요. 불행은 노기를 띠고 파괴시키는 목소리를 가졌어요. 하지만 온화하고 자애로운 목소리도 가졌습니다. 자기 맘에 안 든 낡은 삶을 파괴하고 나면 새 삶을 깨우지요. 더 잘 살도록 자극합니다. (301쪽)



아무리 인생을 긍정한다지만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언제까지나 흔쾌히 껴안을 힘이 없다.

유쾌하고 용기 있는 지몬도 암담한 현실은 버거울 수밖에.


 ... 불행은 때때로 아름답지 못하지요. 이제 저는 기꺼이 그걸 시인합니다.....(306쪽)


그럼에도 지몬은 포기하지 않는다.

글쓰기가 곧 자신이므로.

지몬은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저는 여태 인생의 문 앞에 서 있으면서, 노크하고 또 노크합니다. 하지만 맹렬하지 않게요. 그러고는 제게 빗장을 열어 주고픈 누군가가 오는지 긴장한 채 귀 기울이죠. 그런 빗장은 좀 무겁죠. 그리고 바깥에 서서 두드리는 게 거지라는 느낌이 들면 누가 잘 오려하지 않고요. 저는 오로지 귀 기울이는 자이자 기다리는 자일뿐입니다. 그런 자로서 하지만 완성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저는 기다리는 동안 꿈꾸는 걸 익혔거든요. 그 둘이 같이 돼요. 그리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요. 그러는 동안 저는 반듯함을 유지하고요.

(414쪽)



지몬은 전혀 불쌍하지 않지만 등에 얹힌 생계라는 무게는 힘들다.

소설을 읽고 나서 아릿한 슬픔이 길게 남았다.

듯하게 자신을 지키면서 가만히 기다리는 청년.

힘들어요, 나지막이 말하고는.

싱긋이 웃으며 다시 외롭고 버거운 자신의 길을 떠나는 사람.


예술가는 자신을 활활 끓는 예술이라는 용광로에 내던진 자이다.

비렁뱅이, 밑바닥 인생, 절망을 껴안은 자...

그렇게 맨몸으로 세상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찾아 떠도는 자가 아닐까?

100년 전의 삶에는 처절한 낭만이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 번역이 좀 그렇다.

원문이 우리말로 옮기기에 편한 문체는 아닌 듯 하지만,

번역된 우리말이 매우 부자연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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