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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Nov 23. 2022

시인 횔덜린

책을 기록함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 단편 선집 <세상의 끝>,

임홍배 옮김, 문학판,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들과 단편들을 수록한 이 책에는 시인과 음악가, 그림과 화가들에 대한 짧은 이 몇 편 수록돼 있다.

그중 자신보다 한 세기 이른 시간을 살아갔던 독일 시인 횔덜린에 관한 글은 마치 작가가 시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덜린은 생전에 낭만적인 시를 썼으나 시집은 펴내지 못했고

가난에 시달리며 가정교사 일을 했다고 하는데.

1802년 정신착란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하게 되었고.

1807년 퇴원하여 1843년 사망할 때까지 36년 동안 옥탑방에 갇혀 살았다.



마치 자신의 앞날을 예고하듯 작가는 열렬한 심정으로 시인의 위태로운 내면에 공감한다.

재능과 영혼에 어울리지 않는 어려운 현실 때문에,

작은 호주머니에 마구 구겨 넣어진 종이처럼 위축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시인의 고통.

1915년에 쓴 횔덜린에 관한 글에서 작가는 시인이 겪게 된 정신과 감각의 어려움을 이렇게 헤아렸다.


횔덜린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난에 시달렸기에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가정교사를 하며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이 수공업 기술자와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자유를 향한 열정을 생계와 맞바꾸어야 했고, 제왕처럼 당당한 자부심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일에 짓눌려서 그는 발작을 일으켰고, 그의 내면은 위태로운 충격을 받았다.

(457쪽)



횔덜린이 가정교사로 일한 집안의 여주인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작가의 이해는 이러하다.


그가 마주하는 세계는 침울하고 먹먹하고 캄캄했다. 그는 정 안 되면 유희와 현혹에라도 도취해서 자유의 상실로 인한 끝없는 슬픔을 잊고 싶었고, 노예처럼 사슬에 묶인 채 철창 안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는 사자의 분노를 이겨내고 싶었다. 그런 생각 끝에 그는 가정교사 집의 여주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맺힌 마음이 려서 그럭저럭 견딜 만하게 되었고, 절망으로 숨이 막혔던 답답한 가슴이 진정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오로지 추락한 자유의 꿈을 사랑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주인을 사랑한다고 상상했다. 그의 의식은 온통 사막처럼 황량했다.

(459, 460쪽)



작가는 사랑이 시인의 '상상'이라고 한다.

자유를 잃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다 보니 그런 '상상'을 하게 되었다 는 거다.

그러면 사랑의 대상이었던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작가는 여인의  인용한다.


 가정교사 집의 여주인이 그에게 말했다.

이런 사랑은 불가능해. 횔덜린, 당신이 원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야.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일체의 가능한 한도를 넘어서고,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무너뜨려. 당신은 편히 살기를 원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어. 편히 산다는 건 당신에겐 너무 하찮은 일이고, 정해진 한도 안에서 평온을 누리는 것은 당신에겐 너무 저속해. 당신에겐 모든 것이 바닥 없는 심연이고 한도가 없어. 당신은 내내 그럴 거야. 세상과 당신은 망망대해야.

당신을 편안히 달래려면 당신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당신은 일체의 편안함을 경멸의 대상으로 내치잖아? 일체의 협소하고 갑갑한 것은 당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지. 하지만 한없이 광활한 모든 것은 당신을 고양시키고 또 추락시키지.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그 무엇도 즐기지 못하지. 인내는 당신의 품위에 어긋나고, 그런데 조바심은 당신을 갈가리 찢어놓아. 사람들은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안타까워해. 그렇게 해서는 당신 곁에서 마음 편할 수가 없어."

(461쪽)


잠깐 불어온 연정일 수도 있고 궁지에 몰린 시인의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여인은 상당히 지적이고 진지하며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득실이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사랑받는 여인으로서의 허영심이 없으며,

시인의 순수한 영혼과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했다.

여인은 분명 상당히 끌릴 만한 인간성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재능과 이상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협소한 현실에 갇혀 살았던 시인을,

로베르트 발저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이해했으리라.

그의 고통과 광기를.

재능과 가혹한 운명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정신 나간 것으로 보일 뿐인 시인의 절망적인 고통을 제대로 이해해주기 바라며,

글을 쓰는 작가가 뚝뚝 흘렸던 눈물이 고스란히 글에 고여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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